'소름'과 '이웃집 토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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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살아갈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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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일본 만화영화 <이웃집 토토로>를 쓰려 했다. 광고 카피처럼 13년을 기다려 온 이 영화를 마침내 스크린에서 만나는 가슴 설렘을 나눌 심산으로…. <이웃집 토토로> 속에 담긴 유쾌한 느낌들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굴러가는 일은 원래 없는 법이다. 
우연찮게 <소름>을 보게 되었고, 이어 <이웃집 토토로>를 봤다. 시간으로 치면 12시간도 채 안되게 두 편을 본 셈인데, <소름>의 잔상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이웃집 토토로>를 보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두 영화가 머리 속에 공존하게 되었는 바, 두 영화가 삶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실제 영화와 만화 영화, 한국과 일본, 공포 스릴러와 홈 드라마라는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가 갖는 공통점이 있다면 스토리의 원안, 각본, 감독을 한 사람이 감당하고, 또 정반대의 입장에서 인간과 사회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두 영화에 담긴 각각의 세상은 감독의 세계관이 온전히 반영된 것이라도 보아도 무방하다. 영화의 완성도는 각자의 장르에서 절정에 이르렀지만, 스크린 위에서 움직이는 인간과 세상은 완전히 정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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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란 이름의 악몽 … 소름 

<소름>은 공포 영화의 외양을 띠고 있다. 흑백으로 찍힌 어른과 아기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한줄기 빨간 핏자국을 클로즈업한 포스터나, 억울한 죽음의 역사로 가득 차 있는 철거 직전의 아파트라는 공간 설정도 그렇다. 

미금아파트 504호에 고아 출신의 택시 기사 용현(김명민)이 이사온다. 그는 노름쟁이 남편에게 매맞고 사느라 멍 자국이 떠날 날 없는 510호의 유부녀 선영에게 끌린다. 사고인지 살인인지 모르게 죽어 버린 선영의 남편을 묻어주면서 이 둘의 기묘한 연애가 시작된다. 발각의 공포를 잊어버린 채 연애에 빠져 들어가지만, 505호에 사는 소설가가 들려 준 504호의 내력은 용현이 연애에 몰두하는 걸 막는 불길한 것이다. 용현이 이사 오기 직전, 소설가 지망생의 의문스러운 화재 사망 사건과 30년 전 바람이 나 아내를 죽이고 도망치는 통에 갓난아이 혼자 며칠을 방치되어 있었다는 사건까지…. 한마디로 504호에는 귀신이 깃들여 있다는 것이다. 

이 때부터 원혼의 존재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영화의 주인공들은 각자의 선택에 의해 파국으로 치닫는다. 무엇 하나 뚜렷한 결론을 내려주지 않지만 암시는 충분하다. 화재에서 겨우 구출되었다는 30년 전 갓난아이의 화상 부위와 똑같은 자리에 있는 용현의 화상, 남편을 묻어 놓고도 태연한 선영, 504호의 끔찍한 비극을 소재로 팔자를 바꾸어 줄 소설을 쓰느라 여념 없는 소설가 등 이 영화의 등장 인물들을 조여 오는 공포는 결코 귀신이나 악령처럼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깜빡이는 복도 불빛, 쾅하고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는 물건들, 음산하기 이를 데 없게 끝없이 쏟아지는 빗줄기 등 충실하게 장치된 요소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들이 엮어 가는 삶의 모습이다. 

단 한번도 인간에게 사랑 받아 본 적이 없고, 그 결과 누구를 사랑하거나 믿는다는 감정 자체가 사치스러운 이들이 파국으로 치닫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한 장면도 낭비되지 않고 철저하게 계산된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이들의 모습 뒤로 겹쳐지는 우리 자신의 모습 때문에 소름이 끼친다. 고아로 자라 계속되는 배신을 겪으며 사람을 믿지 않는 용현, 집 나간 엄마와 정신병자 아버지, 때리는 남편이라는 불운과 불행이 연속인 삶을 사는 선영이 택할 수 있는 건 둘이 행복하게 신뢰의 둥지를 틀기보다는 서로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살인마 프레디'나 '구미호'보다 더 끔찍해져버린 우리 삶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악함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이 세상의 괴기함을 …. 

이 영화는 맘 편하게 볼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의 완성도로 보자면 올해 한국 영화 중 가장 큰 발견이다. 공포물에다 심리물 형식을 띄다가, 리얼리즘으로 변신을 거듭하면서 한 장면도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선영 역의 장진영과 현실의 섬뜩함에 광기를 띄어 가는 용현 역의 김명민도 괜찮은 배우의 탄생을 알려준다. 

더불어 사는 즐거움 … 토토로 

<토토로>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통에 아빠랑 사는 두 자매 사츠키와 메이가 엄마가 입원한 병원 가까운 시골 마을로 이사 온다. 천장이 날아갈 듯 큰바람이 불고, 천년은 된 듯한 나무가 숲을 지키는 이 마을에 이 가족이 행복하게 적응하고, 메이가 숲에 사는 오바케(도깨비)인 토토로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전부다. 낡은 집, 논과 내와 채소밭, 자전거가 너무 커 안장을 껴안고 타는 사내아이까지 <토토로>나오는 일본의 시골 풍경은 우리네와 똑 닮았다. 

착한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안 나오는 <소름>과는 정반대로 '나쁜 놈'은 한 명도 안 나오는 <토토로>는 별 사건이 없다. 가장 위험한 사건은 병원을 찾아가던 메이가 길을 잃는 정도다. 초등학교 4학년인 사츠키는 귀찮은 요구로 일관하는 네 살짜리 여동생 메이를 친절하게 돌봐주고, 아빠는 토토로를 보았다는 아이들 말을 군말 없이 믿어준다. 이사 온 첫날 너무 낡아 귀신이 나올 것 같다는 아이들에게 귀신이 나오는 집에서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잘 되었다고 말하는 아빠, 메이와 사츠키를 친손녀처럼 돌봐주는 이웃 할머니까지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남을 보듬어 준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숲에 사는 도깨비인 토토로도 상냥, 친절, 순박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이들과 하늘을 날고, 자가용인 고양이 버스까지 데려다 길 잃은 메이를 도와준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아득하지만 아늑했던 유년 시절의 기억 한 자락과 더불어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 숨기고 있는 선한 기운이 퍼져 나온다. 

기자들이 감독에게 물었다. "왜 당신 영화에는 나쁜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느냐, 현실이 어디 그러냐?" 감독이 말했다. "똑같은 등장인물을 가지고 완전히 다르게 갈 수도 있다. 이웃집 할머니는 왜 우리 밭 채소를 훔쳐 먹냐며 동경 출신 아이들을 닦달할 수도 있고, 메이는 매일 사고치는 통에 아빠한테 혼나고 언니에게 구박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그리고 싶은 세상도 아니다. 나중에 커서 평생 직장에 매여 주택할부금이나 갚고 살아갈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야비함으로 가득 찬 세상에 나갈 아이들에게 그래도 세상은 살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다. 어른이라는 것도 될 만한 존재라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암울하게 그리는 건 다른 사람 몫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중에 <토토로>에 나오는 사람들, 즉 남을 받아들이고 아끼며 차이도 인정하는 따스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별 볼일 없는 어른밖에 될 게 없는 일본의 아이들에게 다른 걸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

우리가 자랄 때 부모들은 우리가 자신들보다 더 나은 세상에 살거라 믿었다. 인터넷도, 자동차도, 집도 없던, 병에든 새 하얀 우유에 침을 삼키던 시절, 정치적으로는 독재였고 경제적으로는 가난했던 시절, 우리들은 별을 보고 노래를 불렀고, 꿈을 꾸었다. 
이제 부모가 되어버린 우리들은 아이들이 우리들보다 더 나은 세상에 살거라 믿지 않는다. 자동차와 집이 있고, 핸드폰에다 인터넷까지, 게다가 민주화가 이뤄졌고 세계 10대 무역국이 된 이 마당에, 음식 쓰레기만 8조원 어치가 넘는 이 풍요로운 시대에 우리들은 별을 볼 수 없고, 노래를 부르지 않으며, 더 이상 꿈꾸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토토로>처럼 살라고 읊조리지만, 실제로는 <소름>처럼 살라고 윽박지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두 영화를 보고 난 후 50년 후의 미래는 <소름>일지 <토토로>일지를 생각해 봤다. 글쎄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없는 자가 가진 자처럼 되려 할 때 세상은 <소름> 비슷하게 변할 거고, 없는 자가 없는 자와 연대할 때 세상은 <토토로> 비슷하게 변할 거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두 영화는 현대 사회의 이중성과 부조리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자, 이제 물신(物神)이 되어버린 가족이기주의를 향한 '딴지걸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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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로> 
www.totoro.co.kr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1941 동경 출생
1963 도에이 동화 입사 
1978 미래소년 코난 
1979 루팡 3세 카글리오스트로의 성
1984년∼1998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 천공의 성 라퓨타, 붉은 돼지, 마녀 배달부 키키, 원령공주 

<소름> www.sorum.co.kr
감독 윤종찬
1963 서울 출생
한양대 연극영화과 졸업, 미국 시라큐즈 대학 영화과 대학원 졸업미국 재학 시절 메멘토, 풍경, 플레이 백 단편 영화 작업 소름으로 장편 극영화 데뷔
현재 호서대학교 연극영화과 영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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