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노동운동사]제16장 제4절 스페인 제2공화정 출범과 국내 전쟁(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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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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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음산하고 비가 내리는 아침, 우리는 병영 안마당에 모여 탄약 주머니에 총알을 채워 넣고 기관총과 권총, 소총을 점검하고 있었다. 갑자기 이제 막 소년티를 벗은 우리 대원 하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우리는 빌바오를 통과하였다. 기차 정류장에는 우리 스페인 동지들의 누이, 애인, 어머니들이 서 있었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울고 있었다. 그리고 국제여단 소속의 우리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불가리아인은 여기에 없는 우리의 어머니, 애인, 누이들을 생각하였다. 스페인 여인들이 나를 둘러쌌다. 그들은 나에게 빵과 오렌지를 건네주었다. 그들은 무척이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젊은이여, 당신에게 키스하며 안녕이라고 말해줄 가족이 여기에는 없군요.“ 기차 안에서 동료 한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이야기 했다.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중요한 일은 싸움에서 이기는 거지. ……” 우리는 〈카르마뇰(프랑스 혁명 때 공화파들이 부르던 노래)〉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우리는 스페인어로 〈젊은 근위병〉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일순간 우리가 불사신처럼 보였다.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머리나 가슴에 총알을 맞아도 결코 죽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국제여단 소속 프랑스 출신 공산당원 지원병 피에르 보쇼(Pierre Bocheau)의 기록. Veevor, 2006: 204.

1. 제2공화정의 출범과 노동자 총파업

1930년 리베라 군사독재 체제가 무너진 뒤, 군주제의 몰락과 더불어 제2공화국이 선포된 것은 1931년 4월14일이었습니다. 노동조합의 총파업이 예고된 상태에서 4월12일 치러진 의회 선거 결과 공화파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4월14일, 알폰소 13세는 망명길에 올랐죠. 이때부터 1936년 7월18일 군부 반란이 있기까지 임시 정권, 사회주의 정권, 우익 동맹의 급진주의 정부, 인민전선 정권을 거치는 과정은 대단히 복잡하면서도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양립한 두 진영이 날카로운 대립 양상을 드러냈습니다. 한 쪽은 노동자계급, 농민의 일부, 민주주의 성향의 인텔리겐치아, 프티 부르주아지, 국가의 변경(邊境)에 살고 있는 주민(바스크인, 카탈루냐인, 갈리시아인)들로 진영을 이루었죠. 다른 한 쪽은 부르주아지와 지주의 동맹을 필두로 한 친파시스트 군부, 왕당파, 전통주의자, 성직자, 농민 가운데 가장 후진적인 층, 민족주의.교권주의적 선전망에 얽혀있는 중간층 등 스페인 사회의 모든 반동적 요소들로 진영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홉스봄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한쪽에는 민주주의와 사회혁명 진영 ―스페인은 사회혁명이 곧 폭발할 수 있는 유일한 유럽 국가였다―이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마르틴 루터 이래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거부하는 가톨릭교회가 열성적으로 고취한 유례없이 비타협적인 반혁명 또는 반동진영이 버티고 있었다(홉스봄, 1996―3: 157).”
1930년대 초 스페인은 세계 대공황으로 전통적 수출품이 창출하던 가치는 반 토막이 나 있었어요. 생활수준의 저하와 사회불안이 불러일으킨 인민의 저항은 러시아혁명에 이어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자아냈습니다. 이 두려움은 여러 나라에서 독재나 권위주의 체제를 용인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키웠죠(Veevor, 2006: 21).
제2공화국 정부는 국가 지출 프로젝트 때문에 발생한 막대한 부채, 화폐가치 하락, 세금인상과 국가 경제 악화 전망에 따른 대규모 외국자본의 철수, 자본가와 지주들의 투자 기피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난관에 직면하고 있었지만, 6개 정당의 연합체였던 새 정부는 여러 가지 개혁적인 정책을 실행했죠. 
정부는 먼저 제2공화국의 헌법 초안을 마련하는 절차를 밟았으며, 1931년 4~6월 사이에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잇달아 공포했습니다. 이 법령들은 지주들이 소작농을 내쫓는다든지, 또는 일용 노동자들을 해당 행정구역 밖에서 고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을 담고 있었죠. 또 하루 8시간 노동을 포함하여 산업부문에서 합의한 고용의 권리를 농업 노동자에게까지 확대했습니다. 
5월 말에는 전쟁부 장관 마누엘 아사냐가 기형적 구조인 군대 편제를 개혁하는 데 착수했습니다. 아사냐는 급료를 다 지불하는 조건으로 장군과 장교들에게 전역을 종용했습니다. 또 16개 사령관구를 8개의 유기적 사단으로 축소 조정하고, 중장 계급을 없앴으며 병사들의 의무 복무 기간을 1년으로 단축하고 육군사관학교를 폐쇄했죠.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은 다름 아닌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었습니다. 

카탈루냐 자치권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제였어요. 1931년 4월에 시행된 선거에서 카탈루냐의 좌파 정당 ‘카탈루냐 공화좌파’(Esquerrra Republicanda de Catalunya: ERC)가 승리를 거두었고, 4월21일 마시아가 카탈루냐 헤네랄리타트의 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공화정과 가톨릭교회 사이의 관계도 1851년의 정교협약이 아직 유효했기 때문에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공화국이 출범한 지 채 보름이 지나지 않아서 스페인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수좌 대주교 페드로 세구라 추기경이 교서를 발표하여 신앙의 자유를 확립하고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려는 새 정부의 방침을 비난하고 나서자, 공화국 정부는 세구라 추기경과 또 다른 사제인 비토리아의 주교 마테오 무히카를 국외로 추방했죠. 6월3일 스페인의 주교들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비난하고,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의무화한 제도를 폐지하는 것에 항의했습니다(Veevor, 2006: 22~23). 1931년 6월28일 실시한 의회 선거에서는 사회주의자, 급진주의자, 자유주의 공화파들이 승리하였고, 7월14일 의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의회가 처리해야 할 주요 과제는 새로운 헌법 제정과 임시 정부의 법률 승인, 그리고 카탈루냐 법령 검토 등이었어요. 
헌법 심의 과정에서 가장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종교단체 해산이었습니다. 격렬한 논의 끝에 예수회만 해산시키고 그 재산을 국고에 귀속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습니다. 교회는 이제 ‘교회는 곧 스페인’이라는 전통 개념을 부정하는 행정부를 상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죠.
또 토지개혁을 둘러싸고도 큰 논쟁이 벌어졌는데, 주요 쟁점은 토지 없는 농민들에게 경작하지 않는 농지를 나누어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중도파와 우파는 그러한 조치들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크게 우려하였죠. 그러한 상황에서 12월9일 결국 국회에서 헌법 초안이 통과되었고, 니세토 알칼라 사모라가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2월15일 아사냐는 총리로서 새 정부를 구성했습니다.
임시정부가 개혁 정책을 시행하고 새 정부의 헌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보수 진영뿐만 아니라 민중 진영에서도 공화국 정부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습니다. 7월6일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이 이끄는 ‘전국노동연합’(Confederación Nacional de Trabajo: CNT)은 전국 전화국 노동자들의 파업을 선언하였고, 그 결과 바르셀로나와 세비야의 통신이 마비되었습니다. 또 전국노동연합은 리베라 독재 정부가 미국의 ITT (International Telephone & Telegraph Corporation)에 매각하여 미국인 소유가 된 ‘텔레포니카 네트워크’에 대해서도 사보타주 행위를 이끌었습니다. 미국 대사는 스페인 정부에 대해 경계 부대 배치를 요구했고, 마드리드 정부는 파업을 주도한 노동조합 간부들을 구속했죠.
정부 조치에 대한 대응으로 전국노동연합은 총파업을 선언한 가운데, 세비야에서는 치안경찰대가 파업파괴자들이 살해한 한 노동자의 장례식을 해산시키는 일이 벌어졌어요. 이 과정에서 노동자 측과 경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치안대원 3명을 포함하여 7명이 사망했죠. 마드리드 정부는 7월22일 전시상태를 선언했습니다. 이에 노동자들은 항의 시위를 감행하였고, 군대와 경찰은 ‘도망자의 법칙’(도망치는 포로들에게는 발포할 수 있다는 원칙)에 따라 무기를 사용하여 시위를 진압했습니다. 그 결과 사망자 30명과 부상자 200명이 발생했고 수백 명이 구속되었어요. 공화국 정부에 큰 희망을 걸었던 스페인 노동자들은 공화정부가 왕정 못지않게 억압적이라고 평가했죠. 전국노동연합은 공화정에 대해 전면전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Veevor, 2006: 24). 
1930년대 초 스페인의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약 200만 명이었고, 그 대부분은 마드리드를 비롯하여 카탈루냐, 바스크, 아스투리아스를 포함한 항만도시, 남부의 광산업 중심지에 집중해 있었습니다. 농업노동자를 포함하여 노동자계급의 총수는 약 400만 명 또는 450만 명으로 추산되었죠.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또는 아나르코 생디칼리슴 경향의 노동조합에 조직되어 있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339).
노동조합운동은 1930년대 초의 투쟁과정을 통해 급속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노동총동맹’(Unión General de Trabajadores: UGT)은 비록 빠르게 성장하고는 있었지만, 그 세력이 전국노동연합에는 미치지 못했죠. 그것은 전국노동연합이 그 전년에 다시 합법 단체가 되면서 빠른 세력 확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정부 통계에 따르면, 1934년 당시 노동총동맹 조합원은 144만 명이었고, 전국노동연합 조합원은 158만 명이었습니다(Veevor, 2006:24).
제2공화정의 출범과 새로운 헌법 채택, 국가와 종교의 분리, 개혁 정책의 실시 등이 단행되었지만, 한편으로 지주제 토지소유와 금융과두의 경제력, 국가 기구와 군대 내 반동 세력의 지위는 완강하게 잔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3년 초 독일에서 파시즘 체제가 설립됨으로써 스페인의 반동 세력은 점점 친 파시스트 경향을 띠게 되었습니다. 1933년 2~3월에는 우익 가톨릭 그룹이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프리메이슨을 근절해야 할 악이라고 선언하고, ‘에스파냐자치우익연합’(Confederación Española de Derechas Autonomas: CEDA)을 설립했습니다. 1933년 10월 말에는 파시스트 정당 ‘팔랑헤당’(Falange Española de las JONS)이 결성되었어요. 우익세력들은 공화정이 이룩한 성과들에 대해 매몰찬 공격을 가했습니다. 
1933년 11월9일에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에서 우익 정당은 혁명을 통해 실질적인 이익을 획득하지 못한 농민층의 불만을 교묘히 이용하여 많은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어요. 알칼라 사모라 대통령은 레룩스에게 내각 구성을 맡겼습니다. 레룩스는 내각을 모두 급진공화당 소속 사람들로 구성했지만, 의회에서는 자치우익연합의 지지를 필요로 했죠. 자치우익연합은 사안에 따라 협력하는 대신, 교회 관련 조치나 농업 개혁, 그리고 노동입법 같은 임시 정부가 실행한 개혁을 되돌리는 정책을 주장하고 요구했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우익 정당들은 정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암흑의 2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사회.정치세력 사이의 대립이 첨예하게 확대되었고, 계급 사이의 대립과 투쟁이 격화되었습니다. 
1933년 초부터는 이러한 위기국면을 타개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이 강도 높게 전개되었어요. 정부 통계에 따르면, 1933년에 1,172건의 파업이 발생하였고, 파업 참가자 수가 84만 3,000명에 이르렀으며 노동손실일수는 1,450만 일을 기록했죠. 
대중 투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에스파냐사회주의노동자당’(Partido Socialista Obrera de Española: PSOE)은 점점 과격 노선을 취하면서, 코르테스(의회)보다는 ‘노동연합(Alianza Obrera)’ 과 같은 외각 조직의 활동을 더 중시했어요. 1934년 1월3일자 〈엘 소시알리스타(El Socialista, ‘사회주의자’)〉는 이렇게 선언했죠. “조화라고? 천만에! 계급투쟁이다! 범죄자 부르주아에 대한 증오를 총동원하여 그들을 끝장내는 것이다.”
그로부터 10일 후인 1월13일에는 사회주의노동자당 집행위원회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토지를 국유화한다.
모든 종교 교단들을 해산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한다.
군대를 해산하고 민주적인 수비대로 대체한다.
치안대를 해체한다.


2월3일에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기 위한 ‘혁명위원회’를 설립했으며, 반란은 ‘내전 성격’을 띠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당내 일부에서는 ‘헛되고 유아적인 환상’이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죠. 마누엘 아사냐는 폭동을 일으키는 것은 군부가 다시 정치에 개입하여 노동자들을 압살할 구실을 제공할 뿐이라고 사회주의자들에게 경고했습니다. 이러한 비판에도 라르고 카바예로는 별로 개의치 않았죠(Veevor, 2006:28).
이러한 논쟁이 당 내에서 격화되는 가운데, 젊은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무장준비와 군사훈련이 은밀하게 시작되었습니다. 우파는 우파대로 북동부의 카를로스파와 아직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 팔랑헤당 당원들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레룩스 정부는 토지개혁을 중단하고 5월에는 스페인 대귀족들의 토지를 몰수한 사회주의 정부의 조치를 취소했어요. 또 농업 노동자도 산업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보호한다는 노동관계법 조항을 무효화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만일 우익 보수 정치세력이 권력을 장악한다면, 여기에 대응해 혁명적 총파업을 조직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공화국을 반동 세력이 장악하는 것을 두려워한 좌파와 중도 좌파 정당들도 필요할 경우, 불법으로 규정된 행동도 불사할 것이라고 밝혔죠. 정부는 총파업을 불법행위로 규정하고, 스페인 전역에 전시상태를 선포했죠. 
1934년 10월 자치우익연합이 내각에 참여하게 된 것을 계기로 하여 전국에 걸쳐 광범위한 항의행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총파업의 형태를 취하기도 했고, 몇몇 지역에서는 무장봉기의 양상을 나타냈어요. 지역에 따라 총파업의 형태와 양상은 다양했습니다.
노동총동맹은 수도 마드리드에서 총파업을 선언했습니다. 파업 참가자들은 내무부 청사와 몇몇 군 시설물을 점거하려 시도했고, 그 가운데 일부는 총을 쏘며 공격하기도 했으나 곧바로 치안유지군이 이들을 체포했죠. 10월8일에 이르러 혁명위원회 구성원 대부분이 체포되었습니다.

 

카탈루냐에서는 전국노동연합이 나서지 않은 상태에서 총파업이 일어났습니다. 전국노동연합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이 시작한 혁명에 힘을 보탤 생각이 없었어요. 이에 반해 카탈루냐 좌파는 마드리드 정부가 카탈루냐 자치법을 처리한 데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있는 상태에서 총파업을 계기로 카탈루냐 독립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파업을 주도했습니다. 10월7일 아침 일찍 총파업 주동자들은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우연하게 바르셀로나에 머물고 있던 아사냐도 함께 체포되었죠.

스페인 북부에서는 혁명적 총파업이 레온의 광산지대, 산탄데르, 비스카야 등지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빌바오에서는 대엿새 동안 치안유지군과 파업 참가자들이 충돌했으며, 에이바르와 몬드라곤에서는 파업 노동자 40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죠. 군대가 출동하고 공군이 광산 지대에 폭탄을 떨어뜨린 뒤에야 총파업은 종료되었어요. 
10월 총파업에서 가장 치열했던 지역은 아스투리아스였습니다. 이 지역은 우익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면서도, 공산주의자들이 상당한 지지기반을 마련한 곳이기도 했죠. 10월5일 새벽에 노동자들은 치안대 초소와 공공건물을 공격하는 것으로 봉기를 시작했습니다. 봉기에 참가한 무장 노동자는 1만 5,000명에서 3만 명 사이였던 것으로 추산됐죠. 그들이 무장한 소총은 대부분 당시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 가장 온건한 인물로 꼽히던 인달레시오 프리에토가 주선하여 보내온 것이었습니다. 다른 무기는 노동자들이 점령한 지역의 무기 공장들에서 넘겨받은 것이었어요. 광산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했는데, 이것을 ‘혁명 대포’라고 불렀습니다.
노동자들은 첫날 미에레스, 히흔, 아빌레스와 광산지대 몇 군데를 장악했습니다. 다음날 그들은 수비대원 1천 명 정도가 지키고 있던 오비에도로 이동하여 치열한 시가전 끝에 도시를 점령했죠. 혁명세력은 코뮌(노농 정부)을 구성하고 화폐를 위원회가 발행하는 쿠폰으로 대체했습니다. 또 기차와 운송 수단을 징발하고 건물을 접수했죠. 그 과정에서 약 40명이 살해되었는데,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부자와 성직자들이었습니다. 봉기는 비록 아스투리아스 한 지역에 국한되었지만, 완전한 내전의 양상을 띠었습니다(Veevor, 2006: 31). 
전국에 걸쳐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전쟁부 장관은 프랑코 장군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했습니다. 10월7일 로페스 오초아 장군이 원정군을 거느리고 루고를 출발하였습니다. 다음날에는 순양함 리베르타드(Libertad: 자유)호가 두 척의 포함을 이끌고 히혼에 도착했고, 그들은 바다에 머물면서 해안 지역에 있는 광산 노동자들을 향해 발포했습니다. 공중에서는 비행기가 탄전 지대와 오비에도에 폭탄을 떨어뜨렸어요. 10월8일 프랑코는 스페인 외인군단 2개 중대와 모로코인 정규군 2개 대대를 파견했죠. 10월12일에는 오초아 장군이 오비에도 전역을 장악했습니다. 그리하여 정부가 동원한 군인과 치안대는 총파업을 진압하였고, 그 뒤로 노동자들과 진보 세력에 대한 잔혹한 탄압이 행해졌습니다. 
아스투리아스 혁명은 2주 남짓 지속되었지만, 1천 명 가량의 인명이 희생되었고 노동자 수천 명이 봉기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났으며, 수천 명이 구속됐습니다. 봉기 주동자 20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실제로 사형이 집행된 사람은 두 사람이었죠. 
아스투리아스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전국 규모에 걸친 노동자계급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노동자와 농민이 결합되지 못하였으며, 봉기의 기술적 준비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패배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우익.반동 세력의 승리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으며, 1935년에는 새로운 혁명 열기가 되살아났어요. 권력이 휘두르는 테러 반대와 희생자 구제, 그리고 정치범의 대사면을 요구하는 정치적 행동이 확대되었죠. 1935년 6월에는 광범한 인민의 요구에 따라 정부는 계엄령을 해제했으며, 노동자 조직에 대해서도 약간의 자유를 허용했습니다. 
1935년 말 자치우익연합과 레룩스가 이끄는 급진공화당연합 세력은 정치적 추문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대통령은 호아킨 차파프리에타(Joaquín Chapaprieta)에게 새 정부를 구성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달 또 한 번 추문이 터졌고, 그 일은 급진공화당 전체에 대한 마지막 타격이 되었습니다. 
대통령 사모라는 자신이 신뢰하던 전임 카탈루냐 주 장관 마누엘 포르텔라 바야다레스에게 정부 구성을 위임했습니다. 새 정부 수반이 된 바야다레스는 1936년 1월 1일 국무회의를 소집했어요. 이 때 그는 이미 코르테스(의회)를 해산한다는 칙령을 손 안에 쥐고 있었죠. 새로운 총선거는 2월 16일에 실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무려 40년 동안이나 자유선거가 실시되지 못했습니다. 

2. 인민전선

1936년 1월7일 선거 일정이 공표되었고, 선거운동은 과열 현상을 나타냈습니다. 이전에 치렀던 선거 결과를 놓고 보면, 정치적으로 연합을 이룬 쪽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죠. 더구나 1934년 10월 총파업에서 보였던 좌파의 혁명적 투쟁과 군대.치안대의 잔인했던 탄압은 우파와 좌파의 타협을 어렵게 했습니다. 
우파는 자치우익연합, 국민블록 내 왕정 지지자들, 그리고 카를로스파의 연합 세력이었습니다. 자치우익연합 지도자 호세 마리아 힐 로블레스는 우파 연합체를 ‘전국 반(反)혁명전선’이라고 불렀어요. 우파 연합체는 시민들에게 배포한 팸플릿에서 만약 좌파가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군중이 무장하고, 은행과 집들이 불타고, 재산과 토지가 분할되고 약탈당할 것이며, 당신의 부인을 남과 공유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선전했습니다. 우파의 선거운동 비용은 지주, 대기업가, 가톨릭교회에서 조달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우파에 투표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 투표하는 것이라면서 우파 연합을 적극 지지했죠(Veevor, 2006: 34~35). 
좌파는 인민전선을 구축하여 선거에 대비하려 했습니다. 1936년 1월15일 사회주의노동자당, 공산당(Partido Comunista de Española: PCE), 공화좌파(Izquierda Republicana: IR), 공화연합(Unión Republicana: UR), 노동총동맹, 마르크스주의 통합노동자당(Partido Obrero de Unificación Marxista: POUM), 생디칼리스트당, 사회주의청년단(Juventudes Socilastas: JJSS) 대표들이 인민전선 협약을 체결했어요. 협약의 주요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⑴ 1933년 11월 이후 발생한 정치․사회적 범죄에 대해서는 설령 재판에서는 그렇게 인정되지 않더라도 법률로서 대사면을 내린다.
⑵ 공화제 국가와 입헌제도의 기본적 사명으로서 자유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협정을 맺은 각 당은 다음 사항을 실천한다. 헌법 효력 부활, 지방법과 자치체법의 공포, 공안법 개정, 사법제도 재편성, 반동적 조건에서 일어났던 경찰관의 폭행 사건 조사, 관리의 복무 규율 개정.
⑶ 농업정책 개선: 직접 경작자에 대한 원조(공조공과: 公租公課) 경감, 고리대 억제, 부당한 소작료 인하 등 농업 생산조건의 개선, 토지소유 개혁(현행 소작법 폐지, 새 차지법[借地法] 공포, 협동조합 형태 촉진, 귀족에 대한 농지의 반환과 보상을 인정한 법률 폐기).
⑷ 산업정책 개선: 산업보호에 관한 법률 공포, 경제.기술 조사기관 설치, 소규모 상공업 특별 보호, 기간산업 활동 진흥.
⑸ 공공사업계획의 실시: 도시.농촌의 주택 건설, 협동조합과 자치체의 공익사업, 항만.도로.관개사업, 토지개량을 위한 대규모 계획 실시. 
⑹ 금융제도 개선: 국립은행의 신용 규제 기능 강화, 민간은행의 본래 규정 준수, 저축은행의 기능 개선, 재정 개혁 실시. 
⑺ 노동자의 정신적.물질적 조건 향상: 사회입법의 타당한 원칙 부활, 노동재판을 독립적인 조건으로 개편, 최저임금 제정. 농촌 임금의 저하 시정, 직업안정소 설치, 공공구호.자선.보건제도 개선.
⑻ 학교 교육제도 개선: 초등교육을 위한 학교설립․보조 교육시설 설립, 중등.직업 교육시설 설립, 대학.고등교육의 집중육성
.

이 밖에도 헌법에 명기된 자치의 원칙을 발전시키고, 국제정책은 국제연맹의 원리와 방법을 지지하는 방향에서 결정한다고 밝혔다(동녘, 1989, 3: 192~202).
인민전선 강령은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는데, 은행 국유화나 토지개혁, 그리고 실업자 원조 등은 강령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타협적 강령은 인민대중 세력의 통일 사업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 채택된 것으로 보입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343~344). 
사회주의자들과 좌파 공화주의자들이 주도한 선거 협약은 아스트리아스 봉기과정에서 만들어졌어요. 인민전선 강령의 설정은 공산당이 주도했는데, 강령은 코민테른의 제7회 대회가 설정한 의제와 결의를 기본 토대로 했습니다. 
코민테른 제7회 대회는 1935년 7월25일부터 8월20일까지 열렸습니다.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가 ‘파시즘의 공세와 파시즘에 반대하고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지향하는 투쟁에서의 코민테른 임무’(보고자는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였습니다. 
디미트로프는 파시즘의 권력 장악은 하나의 부르주아 정부와 다른 부르주아 정부의 일상적인 교체가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 지배의 한 국가 형태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또 하나의 형태인 공공연한 테러 독재의 교체라는 것,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대중에게 있어 지금 절박한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냐 부르주아 민주주의냐의 선택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냐 파시즘이냐의 선택이라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또 디미트로프는 반파시즘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행동통일에서 제기되는 유일한 조건은 “파시즘에 대해, 자본의 공세에 대해, 전쟁의 위협에 대해, 계급의 적에 대해 적대하는 방침을 취하는 것”이라 제기했죠. 그리고 그는 인민전선 정책의 기본적인 문제들을 규명했는데, 프롤레타리아가 인민전선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일반 민주주의적인 임무들의 해결을 통하여 대중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국면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동녘, 1989, 3: 132~133)
코민테른 제7회 대회는 인민전선 정책이 추구하는 사상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습니다. “일반민주주의적인 요구들을 위한 투쟁을 통하여 광범위한 근로자층을 결집하고, 파시즘을 타도하며 자본의 권력을 제한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투쟁을 위한 유리한 기초 조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상이다.”(김성윤, 1986, Ⅱ: 119).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근거와 배경을 지니고 창립된 인민전선은 1936년 2월16일 치러진 총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인민전선은 의회 의석 263석을 획득하였고, 우파와 중도파는 210석을 차지했죠. 2월19일 아사냐가 정부 수반으로 임명되었으며, 4월4일 의회가 소집되자 아사냐는 입법 계획과 농지개혁안을 제출했습니다. 4월7일에는 알칼라 사모라가 공화국 대통령직을 아사냐에게 인계했어요.
도시와 농촌에서 대중행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정치범이 석방되고 산후르호 쿠데타에 연루된 귀족들의 토지가 몰수되었으며, 10월 혁명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직장을 잃은 모든 노동자들의 복직이 결정되었습니다. 1936년 4월에 정부는 스페인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들은 자치권을 갖는다고 선언했죠. 
이처럼 인민전선 정책이 시동 단계에 들어선 시기에 왕당파와 동맹한 군사 음모 조직자들은 은밀하게 반란을 준비했는데, 그 중심에 팔랑헤당이 있었어요. 팔랑헤당은 여러 곳에서 자금을 지원받았으며, ‘국민행동청년단’(Juventudes del Acción Popular: JAP) 단원들이 당에 합류하면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1936년 봄에 청년 단원 1만 5,000명이 합류함으로써 팔랑헤당의 당원은 거의 두 배로 늘어 3만 여명에 이르렀죠. 한편, 카를로스파는 피레네 산맥에서 의용군인 레케테(requeté)를 훈련시키기 시작했습니다. 
1936년 봄에는 카를로스파 최고군사위원회를 비롯하여 우익 장교들의 비밀결사체인 ‘에스파냐군사동맹’(Unión Militar Española), 알폰소 13세를 지지하는 왕당파, 그리고 팔랑헤당 등이 함께 반란을 모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사냐 정부는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막연한 소문으로만 듣고 있었죠(Veevor, 2006: 43).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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