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별노조 시대 노동조합의 복지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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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재단의 후원을 받아 이루어진 「산별노조 시대 노동복지 전략」 보고서의 일부를 요약·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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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별노조 시대 새로운 복지전략의 필요성

한국의 노동자와 노동조합은 자신의 복지욕구를 국가나 공동체보다는 자신의 고용을 책임지고 있는 개별 기업이나 사용자에게 해결하라고 요구하는 것에 익숙하다. 이러한 관행은 기업별 임금인상투쟁과 더불어 ‘사내복지 요구’로 당연시되어 왔다. 그런데 1987년 이후의 기업복지는 노동자들이 조직화되어 있으며 비교적 동원력이 강한 대규모 사업장 일부에서만 그나마 실시되고 있고, 대다수의 중소기업이나 비정규 노동자들은 그 혜택에서 제외되어 있다. 

이러한 기업복지의 ‘선별성’은 기업별노조체제와 맞물리며 전체 노동자 집단 내부에서의 복지 불평등을 확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복지수준과는 별개로, 대기업 조직노동자들은 이미 기업이 제공하는 ‘사적 복지국가’(private welfare state)의 울타리 속에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그 대척점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경우 기업복지는 말할 것도 없고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등의 사회보험 가입률이 33~36%밖에 안 될 정도로 복지혜택으로부터 배제된 채 노동생활을 하고 있다(김유선, 2008). 

그렇다면 지난 20여 년간의 선별적 기업복지 체제는 노동자 연대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난 20년의 경험 속에서 대기업의 조직노동자들은 사적 복지국가의 울타리에 속하게 되었고, 이들은 그러한 토대 위에서 생애주기의 변화에 따르는 복지욕구의 해결을 위해 다시 자신을 고용하고 있는 사용자에게 복지비용을 요구하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부분이 ‘왜 한국의 조직노동은 보편적 복지국가 건설에 적극적이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대해 일정한 설명을 제공해 준다(양재진, 2005). 

이론적으로 이것을 ‘복지를 둘러싼 노동의 선호형성’의 과정으로 포착할 수 있다. 일본과 미국과 같이 국가복지보다는 기업복지가 발달한 사회는 단순히 계급 간 힘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업별 노동운동과 실리조합주의가 낳은 노동의 선호형성의 과정이 기업복지 중심의 복지체제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또한 복지의 특수성이 작용한다. 복지는 순수한 공공재와는 달리 그것의 소비가 ‘경합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공공복지라고 해도 내가 1단위의 복지 소비를 증가시키려면 타인의 소비가 1단위 줄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추가 공급이 필요하다. 이러한 소비의 경합성은 다양한 선호를 낳는 요인이 된다. 

이에 따라 기업별노조의 경우, 타기업 노동자의 복지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조의 자원을 집중하고 희생할 ‘합리적 이유’가 없다. 노조활동을 통한 복지혜택이 해당기업의 노동자들에게만 돌아가게 만들려는 유인이 강하게 작용하기 마련이고, 이를 통해 기업복지에 대한 선호가 형성된다. 예외적인 경우 노조 지도부가 전체 노동계급의 단결을 위해 보편주의적 복지프로그램을 주창할 수는 있지만, 복지소비의 경합성을 인지하고 있는 평조합원들의 거부권을 돌파하기는 매우 힘들다. 이러한 복지 환경 속에서 노동자의 집합행동은 그 경계가 뚜렷하고 외부에 대해서는 대단히 폐쇄적인 ‘집단 연대’(group solidarity)의 특성을 강하게 갖게 된다(Hechter, 1987). 

반면에 노동자들이 산업별 또는 업종별로 조직되어 있는 경우, 더 나아가 전성기의 스웨덴 노동운동처럼 노조가 전국적 수준에서 중앙집권화 되어 있는 경우, 보편주의적 복지프로그램에 대한 노동자들의 선호형성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커질 수 있다. 거기다가 정치권력을 넘볼 정도로 정치세력화가 되어 있을 경우에는 노동계급을 넘어 다른 계급과의 연대까지 고려하게 되어, 사회보험의 문턱을 낮추거나 소득에 따른 기여 대신 조세로 운영되는 비기여 복지프로그램까지도 선호의 대상 범위에 들어올 것이다.

이 글에서는 복지체제가 갖는 독립변수로서의 위상에 주목한다. 다시 말하여 한 사회가 특정한 형태로 복지욕구를 해결하는 방식은 그 사회의 정치경제적 환경, 계급구조, 노동운동의 권력자원, 기존 복지제도의 관성 등의 변수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세심한 정책패키지의 구성을 통해 마련된 복지정책과 복지전략은 노동계급의 연대와 계급 간 연합을 가능케 함으로써 노동운동의 권력자원을 증가시키고 나아가 한 사회의 정치경제적 환경과 계급구조에도 일정한 변형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복지정치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최근 들어 한국 노동조합의 조직형태가 기업별노조에서 산업별 노조로 전환하고 있고, 이것은 노동조합의 복지개입에 있어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배경으로 아래에서는 독일과 스웨덴의 초기 노동운동 역사 속에서 노동운동의 복지개입 전략을 검토한 후,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산별노조인 보건의료노조, 금속노조, 금융산업노조, 증권노조를 중심으로 2000년 이후 산별교섭에서 체결된 산별복지 관련 합의의 현재적 의미를 진단할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향후 본격화될 산별노조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노동복지 전략을 구체화하기 위한 미래적 의제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2. 독일과 스웨덴의 초기 노동운동의 복지정치 사례

19세기 후반부터 1920년대까지는 유럽을 중심으로 현대적 복지제도들이 속속 도입되던 시기였다. 또한 이 시기는 서구의 노동운동에 있어 조직혁명이 일어난 대변화의 시대였다(Marks, 1989). 노조 조합원의 급증, 조직률의 확대, 친노동정당의 결성 및 정치 참여, 직종노조에서 산별노조로의 전환 등이 모두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동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노동운동의 질적 성장과 현대적 복지제도의 도입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었는가? 아래에서 독일과 스웨덴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1) 독일: 사회보험의 전략적 수용과 산별노조의 조직 확대

19세기 후반 태동기의 독일 노동운동은 비스마르크의 철권 통치 아래서 ‘사회주의자탄압법’의 발효 등으로 정치적인 탄압을 받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세계 최초로 사회보험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것은 노동운동의 아래로부터의 압력이나 좌익정당의 입법 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당시 발흥하는 사회주의세력으로부터 일반 노동자를 분리하여 국가에 충성하는 세력으로 유인해내기 위한 ‘당근’으로 도입된 것이다. 

사회보험제도 입법에 대해 당시의 노동조직들은 그 정치적 의도를 경계하면서 우려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는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다. 독일의 노동운동세력은 당시의 경제위기 속에서 사회보험정책의 잠재성을 인상 깊게 체험하면서 그 정치적 중요성을 포착했다. 그 결과 질병보험(1883년), 산재보험(1884년), 장애노령연금(1889년) 등의 사회보험제도의 제도적 구조 자체가, 정치적 탄압을 받던 초창기 독일 노동운동의 매우 중요한 조직적 기반으로 전화되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보험기금의 자치 운영(self-administration) 원칙 때문이었다. 기존의 노동조직들은 질병금고를 자치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자치 운영의 원칙이 사회보험에도 적용되어 노동조합 대표들이 보험기금의 운영과 관리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고, 또 이를 통해 노동조합의 조직적 발전이 획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사회보험 운영기구는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활동가들에게 조직 확대의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독일제국의 정치적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통로가 부재한 상황에서, 사회보험 운영기구의 자치적 참여는 단순한 상징적 권리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에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 분야에서 그 대표들이 실제로 상당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독일 노동운동 세력은 사회보험 운영기구 대표자 선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전국 각지에서 질병보험, 산재보험, 노령연금 기금 등의 행정에 참여한 노조 대표들의 규모가 대략 10~12만 명으로 추산될 정도였다(1901년 독일 전체의 노동조합원이 약 48만 1천 명이었다). 이것은 당시 노조 활동의 영역 중에서 사회보험 행정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수치이다(Manow, 1997). 

노조 대표들의 사회보험 행정기구 참여와 지배는 특히 노조 활동가들에게 활동의 장을 마련해 주고 상당한 예산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개별 사용자들에 의해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던 노조 활동가들은 질병금고의 행정인력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1905년경 사회보험 행정기구의 전임자 중 대략 3,000~6,000명의 직위가 노조에 의해 장악되었다. 당시 독일 전역에서 노동조합 전임자가 대략 980명 정도였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사회보험 행정기구가 노조 활동가의 풀(pool)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Manow, 1997). 

사회보험은 또 다른 측면에서 노동조합의 조직적 발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사회보험 기금이 노동자의 주택문제 해결을 위한 재정으로 투입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적절한 주거를 갖추지 못한 대다수 노동자들의 자조조직이었던 주택조합들은 이러한 사회보험에서의 대출을 통해 급성장하게 된다. 이 주택조합들은 단순히 주택건설만 하는 기구가 아니라 노동자 주택단지의 일상적 운영에도 책임을 맡는 조직이었다. 때문에 이를 통해서도 노동조합의 조직적 진출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주택조합들은 노동운동을 위한 사회적 지원조직으로 전화된다. 

따라서 19세가 후반과 20세기 초반 독일 노동운동은 노동조합, 사회민주당, 질병보험과 연금, 주택협동조합, 지역의 저축 및 대부 조합 등 여러 조직들 사이에 그 구성원이 겹쳐지면서 발휘되는 긴밀하면서도 탈집중화된 인적 네트워크에 의해 조직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노동조합-노동정당-사회보험-협동조합의 네트워크가 제공하는 혜택이 특정한 직업이나 직종의 특권적 노동자 집단에게만 제공되지 않았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노동의 네트워크가 대개 산별노조를 중심으로 지역적 특성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는 특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일의 경험은 처음 노동운동에 해를 끼칠 것이라 여겨졌던 근대적 사회보험 제도가 노동운동의 ‘전략적 수용’과 ‘참여적 개입’을 통해 반대의 효과, 즉 노동운동의 조직적 기반의 확대와 노동운동의 튼튼한 네트워크의 창출 그리고 산별노조의 조직적 성장에 매우 큰 기여를 했음을 보여준다. 독일의 개별 노동자들은 질병, 상해, 노령, 장애, 실업 등의 사회적 위험에 대한 집단적 해결의 절차에 있어 국가와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게 아니라, 그 중간에 노동조합을 통해 모든 실제적 절차가 진행되도록 한 자치운영의 원칙 하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또한 노동조합들은 그만큼 노동자의 일상생활과 폭넓게 접촉하여 그 조직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2) 스웨덴: 겐트시스템 도입과 노동운동의 전략적 개입

현대적인 실업보험제도는 정부의 주도로 의무적인 보험료 납부를 강제하는 시스템(한국은 여기에 해당한다)과, 노동조합이 기금의 축적 및 운영을 담당하고 정부는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자발적 시스템으로 크게 구분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후자, 즉 겐트시스템(Ghent system)이 도입된 국가의 경우 실업보험이 노동조합의 힘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해왔다. 겐트시스템이 운영되는 국가는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벨기에, 아이슬란드 등으로 모두 조직률이 매우 높은 국가들에 속한다. 

겐트시스템에서 실업보험은 직접 노조에 의해 또는 노조가 운영하는 실업기금에 의해 관리된다. 따라서 노조 간부가 실업정책의 실행에 있어 제도적 권력을 보유하게 된다. 반면에 우리처럼 정부 당국이 운영하는 의무보험제도의 경우 실업정책의 실행에 있어서 제도적 권력은 정부 관료가 갖고 있으며, 노조 조합원 여부는 실업보험 수급자격과 하등의 관련을 갖지 않는다. 

이와 같은 제도의 특성 때문에 겐트시스템은 노동조합의 힘, 더 나아가 노동자계급의 역량을 강화하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라 지적된다. 다시 말해 첫째, 비조합원이 실업보험을 수급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하기 때문에 비조합원의 노조 가입 동기를 높일 수 있고, 둘째, 실업자에게 적절한 일자리가 무엇인지 결정하는 데 있어 노동조합이 영향력을 미치거나 심지어 결정할 수 있으며, 셋째, 그 제도를 노조가 직접 운영함으로써 노동력 공급에 대한 노조의 통제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강력한 노동운동이 이미 존재하여 그것의 영향으로 겐트시스템이 도입된 것이 아니었고, 반대로 겐트시스템의 도입 이후 그것으로 인하여 노동조합의 힘이 성장했다는 점이다. 20세기 초반 겐트시스템은 대부분 친노동정당이 아닌 자유당이나 보수당의 집권 아래서 도입되었다. 유일한 예외는 스웨덴 사례다. 스웨덴은 유일하게 겐트시스템이 사민당 집권 시기인 1934년에 도입되었다. 그것은 스웨덴 노동운동의 전략적 판단이 깊숙이 작용한 결과다. 

스웨덴에서 노조 조직화의 물결은 뒤늦게 왔지만 매우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빠르게 성장하던 스웨덴의 노조들은 실업 노동자들과 취업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의 훼손 -실업자들이 파업의 대체 인력으로 투입되거나 파업 파괴자로 고용되는 일이 당시 스웨덴 사회에서는 비일비재했다- 을 막기 위하여, 노조 자체적인 실업기금을 조성했다. 20세기에 들어와 스웨덴 노조들은 정부에게 공적 실업보험의 도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웃의 덴마크(1907년)와 노르웨이(1906)에 비해, 스웨덴에서의 실업보험 도입(1934년)의 노력은 매우 뒤늦은 것이었다. 

1932년 사민당은 소수연립정권에 참여하게 되었고 자유당과 타협을 통해 1934년에 겐트시스템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이 타협을 이루어내기 위하여 사민당은 실업보험의 내용적 측면에서 중요한 양보를 했다. 정부의 감독권 인정, 비조합원들에 대한 실업기금의 개방, 실업급여 수준의 저하, 사용자의 보험료 납부 면제 등이 그러한 중요한 양보의 내용이었다. 대신에 사민당은 실업기금의 운영이 전적으로 노조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한 제도 운영의 형식을 관철했다. 이것은 노조 간부들이 실업자의 재취업 시 적절한 일자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 권한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노조의 임금수준을 저하시키는 저임금 직종이나 노사분쟁을 겪는 직종에 실업자가 취업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노동력 공급에 대한 노조의 통제력이 강화된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판단은 당시 노동운동 지도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는 점에 주목을 요한다.

당시 겐트시스템 도입에는 구스타프 묄러(Gustav M?ller)를 중심으로 한 스웨덴 사민당 지도부의 전략적 판단이 강하게 작용했다. 그는 사민당의 2인자이자 초대 사민당 정부에서 사회부 장관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1930년대 초반 10~30%대를 기록하던 고실업을 겐트식 실업보험으로 극복할 수는 없지만 그 제도의 원칙이 정착된 후 부르주아정당에 양보했던 실제 내용을 추후에 얼마든지 향상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묄러는 당시의 노조 지도자들에게 겐트시스템이 장차 노동자들을 노조에 가입시키는 가장 큰 무기가 될 것임을 역설했다. 즉 노동운동의 장기적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정책의 세부 내용을 양보하고 대신 제도적 설계상의 지렛대를 얻어내자고 한 것이다. 

그러나 겐트시스템 도입 이후에도 노동조합들은 실업기금을 등록하거나 새로운 기금을 창출하는 데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1930년대 후반 스웨덴 노동조합 내부에서는 실업보험에 관한 논쟁이 매우 뜨거웠다. 일례로 스웨덴 금속노조의 지도부들은 묄러의 겐트시스템에 찬성했지만, 1936년과 1939년의 금속노조 총회에서는 이 제도의 신설과 운영 안건이 연속적으로 부결되기도 했다(Rothstein, 1992). 

하지만 1941년에 노조에 우호적인 내용으로 실업보험 개정이 이루어지면서부터 묄러의 예견은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스웨덴의 실업보험제도는 성장하기 시작했고, 노조들은 그들의 실업기금을 당국에 등록하고 신규기금을 만들었다. 그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실업보험의 내용이 노조와 실업자에게 유리하게 변경되었다. 이를 통해 스웨덴 노동조합은 실업률이 상승할 경우 오히려 조직률이 늘어나는 사태를 경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당연히 몇 차례 집권에 성공한 부르주아 정당들이 이 겐트시스템을 폐지하려고 했으나, 그들의 주요 지지층인 화이트칼라와 전문직 종사자들의 노동조합 또한 이 시스템을 통해 성장했기 때문에 쉽게 제도의 폐지를 강행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웨덴은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르주아 정당과 사용자 조직들이 국가가 운영하는 의무적인 실업보험제도의 도입에 적극 찬성하는 곳이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스웨덴의 사례는 스웨덴 초창기 노동운동의 ‘전략적’ 복지정치를 잘 보여준다. 겐트시스템의 실업보험이 다른 유럽 국가들의 경우 부르주아 정당들의 주도로 도입된 반면, 스웨덴은 사민당과 노동운동의 주도로 매우 의도적으로 도입되었다. 노동시장에서 노동력 공급을 노동조합이 통제할 수 있다면 노동운동의 조직적 힘은 크게 신장될 것이다. 스웨덴 노동운동이 주목한 것은 겐트시스템이 바로 그러한 정치적 잠재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본 독일과 스웨덴의 사례는 한국의 노동운동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 두 가지 사례는 노동자계급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는 복지제도의 도입 시기에 노동조합의 전략적 개입의 중요성을 웅변한다. 복지제도의 도입을 전후한 시기는 그것의 발전 경로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가변적인 시기이기 때문에 경로형성에의 주체적 개입의 여지가 상대적으로 크다. 19세기 후반의 독일과 20세기 초반의 스웨덴은 오늘날 발견되는 양국 특유의 노사관계, 정치경제체제, 노동운동의 전통 등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시기였다. 독일의 노동운동은 정치적 탄압으로 지하활동으로 전환되어 있었고, 스웨덴도 조직률이 30~40% 정도에 불과했다. 여기서 복지정치에의 개입이 노조운동의 조직적 성장을 위한 제도적 기반으로 작용한 것이다. 재차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노동운동 리더십의 과감한 전략적 판단과 일관성 있는 정책 집행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3. 한국 산별노조의 노동복지 전략의 현황

한국 산별노조는 대다수 사용자의 반대 속에서 기업별노조에서 주체적인 조직 통합을 통해 이루어져 온 관계로, 최근까지 조직구조의 전환이 가장 큰 과제였다. 그러나 이에 비해 교섭구조 및 교섭의제의 ‘산별화’는 상대적으로 미약한 실정이다. 사용자단체의 구성도 몇몇 업종 또는 산업에 국한되어 있고 그나마 내부적 규율 능력은 별로 없는 실정이다. 또한 산별교섭의 주요 의제인 임금과 고용 모두 중앙교섭의 포괄성과 규제력은 매우 취약한 상태다. 산별교섭을 통한 조합원 내부의 임금격차 축소가 성공한 사례도 거의 없고, 한국의 최대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의 경우 임금교섭은 지부 또는 지회로 분권화되어 있어서 임금교섭의 중앙화는 아직까지 조직적 과제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현재 시점에서 한국의 산별노조들은 조직의 확대, 교섭구조의 집중화 및 제도화라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교섭의제 중 산별복지와 관련된 내용은 현재까지 중심적 의제로 부상하지 못하고 있으며 매우 초보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산별복지 의제는 꾸준히 교섭 석상에서 거론되어 왔고, 미약하게나마 노사 간의 공감대가 형성된 부분도 적지 않다. 아래에서는 보건의료노조, 금속노조, 금융노조, 증권노조 등 대표적인 산별노조들의 중앙교섭을 중심으로 산별복지의 현황을 살펴보고 일정한 평가를 수행했다.   



보건의료노조와 금속노조는 민주노총 차원의 ‘연대기금’ 요구에 발맞추어 2004년에 산별교섭을 통해 기금 출연을 요구했고 이것이 산별차원의 복지요구의 출발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연대기금은 노조의 사회적 고립의 돌파와 산별노조의 상징적 위상을 알리기 위한 선언적 의미가 다분했다.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면 기금의 용도나 사용방안 등에 대해서는 우선순위가 불분명하게 나열되어 있었고, 전체적인 산별복지 프로그램과의 연계성에 대한 고민은 적었다. 따라서 교섭에서 합의를 보았더라도 실제 기구가 가동되거나 논의가 공식화되지는 못했다. 

그 후 두 산별노조는 상이한 요구안을 제출한다. 보건의료노조는 2005년 교섭에서 전년도의 연대기금 합의를 구체화하는 방안을 제출하는데, 여기에는 기금조성 방안, 사용내역, 기금관리기구 설치 등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요구안은 교섭에서 합의를 보지 못했고 2008년 중앙교섭에서 ‘산별연대기금’ 요구로 재출현한다. 2005년의 요구안과 2008년의 요구안에서 보이는 중요한 차이는 사용내역에 관한 것이다. 2005년의 경우 직업훈련센터 설립, 복지연수원 건립, 고용안정기금 지원 등이었는데, 2008년 ‘산별연대기금(안)’에는 보다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사용목적이 제시되고 있다. 노사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여기에는 노동양극화 해소, 비정규문제 해결, 고용안정과 직업훈련, 산업복지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기금 용도에서의 차이는 2005년에서 노조가 제시한 용도가 2007년 협약에서 마련된 ‘산별중앙노사운영협의회’ 내의 ‘고용안정및교육훈련소위원회’의 목적사업으로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보건의료노조는 앞의 노사협의기구 구성 및 운영의 실효성을 높이고 노동조합의 정책적 역량의 강화와 개입력을 제고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에 반해 금속노조의 경우 2004년의 사회공헌기금 조성안이 완성차 내부의 교섭으로 해소된 이후 2005년에 오면 ‘산별고용안정시스템 구축’이 의제의 중심에 들어오게 된다. 당시 금속산업사용자협의회가 구성되면서 이 합의안이 현실화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2006년부터 대공장 노조의 산별전환과 조직체계 정비, 새로운 교섭구조의 확립 등 내부적 과제에 전념하게 되면서 2005년에 합의한 산별고용안정시스템 구축을 위한 노사협의기구는 유명무실화된 합의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2008년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금속노조는 산별복지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요구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내부의 임금 및 근로조건의 격차와 기업복지의 불균등성이 매우 큰 금속노조의 경우, 조합원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적 의제를 개발하여 조직적 동의를 구하는 문제가 현재의 과제로 제기된다. 앞으로 완성차업체의 중앙교섭 참가와 사용자단체의 재구성 등 교섭구조와 환경이 정비될 경우 산별복지 의제는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노조와 증권노조는 업종의 특성을 반영한 산별복지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금융노조의 경우 산별교육훈련과 전직지원체계에 특화된 모습을 보였고, 증권노조의 경우 산별퇴직연금 도입을 선도적으로 제기했다. 특히 금융노조의 경우에 노사정위원회에서 논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산별교섭에서 의제가 합의되었던 것은 주목을 요한다. 그러나 양 조직 모두 산별중앙의 역량 취약과 사용자단체의 미비 등으로 합의 이후의 실제 진행은 없었고 거의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현재까지 한국의 산별노조들의 산별복지에 대한 의제 설정과 행태를 요약하자면, ‘의제의 주변성’과 ‘실행능력의 취약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의제의 주변성’은 태동기의 산별노조로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아직까지 산별교섭의 제도화는 조직적 과제로 남아 있고, 노조뿐만 아니라 사용자단체의 조직적 규율력과 정책 역량이 미약한 수준이다. 교섭구조 설정, 임금 및 근로조건 통일, 비정규직문제 해결, 초보적인 수준의 산업정책 개입 등이 현재 산별교섭의 중심 의제들이다. 이에 비해 중장기적인 투자와 세심한 노사협의를 요하는 산별복지 프로그램들은 노조의 활동과 교섭에 있어 주변적인 의제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실행능력의 취약성’은 되돌아보아야 할 사항이다. 요구안 마련과 노사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아니고, 수차례 중요한 의제들이 노사 간 산별협약으로 체결됐음에도 후속 조치나 실행 노력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산별노조 중앙이 가져야 할 정책능력 부족에서 그 주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국 산별노조 중앙의 정책담당 인력은 요구되는 과제에 비해 매우 적으며, 산별복지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인력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본조 인력 집중도가 여전히 증대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간 한국 노동조합운동에서 복지정책에 대한 주변적 관심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실행능력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미 구성하기로 합의한 노사협의기구를 중장기적 관점에서 개입하고, 그 속에서 정책개발 능력과 실행능력을 점진적으로 제고할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독일의 노동조합의 경우 20세기 초반 전국적 수준, 산업적 수준, 지역적 수준에서 사회보험과 관련된 운영 및 협의기구에 노조 인력이 참여하게 된 후 수십 년의 시간 동안 그 속에서 사회정책의 운영 및 관리에 대한 노하우를 학습했고, 그 경험의 축적이 노동조합과 사민당의 정책역량 강화로 나타났다. 우리의 경우에도 산별복지를 둘러싼 노사협의기구를 매년 반복되는 교섭과 투쟁과는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성격의 기구로 가져가는 게 노동조합의 정책역량 강화와 실행능력 제고를 위해서 더 유용할 수 있겠다. 2008년 보건의료산업의 중앙협약에서는 산별중앙노사협의회의 성실 운영을 위한 합의가 있었다. 이 기구의 운영 내실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마지막으로, 현재 산별교섭에서 임금과 고용이라는 중심적 의제를 통한 노동의 연대 강화가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 상황에서, 복지 의제를 통해 초창기 산별노조의 제도적 인프라를 구축할 필요성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임금교섭의 중앙화, 조합원 내부의 임금격차 축소 및 임금제도의 통일성 확보 등은 현재 단기적으로 해결하기 매우 힘든 과제들이다. 또한 기존 정규직 조합원의 고용안정과 비정규직의 차별 철폐 및 일자리 보호는 현실에서 갈등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또한 향후 예상되는 경기침체 국면에서 고용 의제는 단사 수준의 고용안정 요구에 갇혀버릴 공산이 크다. 임금과 고용 등의 핵심 의제에서 내부의 통일성과 단결을 꾀하기 힘든 조건이라면, 산별노조의 구심력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적 인프라를 산별복지 의제와 관련하여 구성할 필요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4. 산별복지의 미래 의제

1) 선택적 유인으로서 산별복지 프로그램


노동조합이 제공하는 복지가 선택적 유인 효과와 더불어 개방성을 담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분산화와 파편화를 극복해야 한다. 산별노조는 이러한 점에서 기업별노조와 기업복지가 갖는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형태다. 선택적 유인을 강조하는 까닭은 산별노조의 조직력 강화와 조합원과의 호응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 중의 하나가 산별노조의 독자적인 복지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현재 상황처럼 산별노조 조직률이 비교적 낮고 조직적 규율능력이 취약한 경우, 기존 조합원과 잠재적 조합원을 산별노조의 품으로 끌어 들이기 위한 ‘당근’의 필요성이 매우 크다. 

현재에도 선택적 유인에 해당하는 산별노조의 조합원 복지제도는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2007년 12월 통합금속산별의 규약개정 대의원대회에서 ‘조합원의 신분보장에 관한 조항’을 개정하여, 비정규 조합원이 계약 해지된 상황에서도 신분보장기금을 적용받을 수 있게 한 것이 한 예이다. 이외에도 향후 산별차원의 조합원 복지프로그램으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조합원 규모와 재정이 증가하는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는 산별노조의 경우 이러한 추가적인 복지혜택을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실업에 처한 조합원을 위해 기존의 고용보험 실업급여를 산별 차원에서 보충할 수 있는 ‘보충적 실업기금’이 있다. 금속노조의 산별고용안정시스템과 보건의료노조의 산별연대기금 논의에서 이미 비슷한 아이디어가 제시된 바 있다. 또 하나로 ‘일과 가정의 양립 프로그램’을 들 수 있다. 보육과 육아, 노인 돌봄 서비스 등을 사업장이 밀집한 지역에 설치하거나 기존 시설과 계약을 맺어 조합원 및 조합원 가족이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미국의 미시간 플린트 지역에는 전미자동차노조(UAW)가 지역기관과 협정을 맺어 아동발달센터, 근거리 보육시설 및 직장보육시설을 조합원에게 제공해주고 있다. 금속노조에서도 2007년 사업장 보충교섭 통일요구안에 직장보육시설 설치 및 방과후 교실 설치운영 건을 포함한 바 있다. 

2) 기업복지의 사회화 방안

①기업복지의 문호 개방과 지역화


노동조합운동은 그간 기업복지로 주어졌던 복지의 총량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노동자 내부의 분할을 최소화하는 대응방향을 수립해야 한다. 이를 위한 출발점은 ‘기업별’ 영역을 넘어서 사고하는 일이다. 이러한 면에서 기업복지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응방향은 기업별 노사관계체제를 넘어서는 조직재편(산별노조 건설)과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현재적 상황에서 단기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복지의 문호를 사내 비정규직에게 개방하는 것이다. 현금성 기업복지는 한계가 있으나 현물과 시설이용은 정규직 노조와 조합원의 결단으로 가능하다. 특히 제조업의 경우 사내하청 비정규직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데, 이들 중 기혼자들은 많은 경우 맞벌이를 하고 있다. 지부단체교섭이나 노사협의회 등의 채널을 통하여 기존 사내육아보육시설의 확대를 요구하거나 지역의 산별노조 조합원 가족들도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지역사회에 건립한다면, 기존 이용자의 편익을 해치지 않고서 그 혜택을 비정규직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에게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완성차 공장 안에는 사내 복지시설로 헬스장, 물리치료실, 재활실, 서클룸 등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사내하청 비정규직들은 이 시설들을 이용하지 못하거나 이용할 수 있더라도 ‘눈치가 보여’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 또한 정규직 노조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개선이 가능한 부분이다. 

다음으로 기업복지의 재원 및 시설을 사업장 안에 투자하기보다 해당 지역의 노동자 집단주거지에 설치하여 운영함으로써 ‘기업복지의 지역화’를 도모하는 방안이 있다. 노동자문화센터, 지역노동자복지시설, 육아보육시설 등을 지역에 건립하고 노동조합이 그 운영과 관리에 개입함으로써, 노동조합의 지역사회 개입력을 높일 수 있는 통로로 활용하면서 동시에 지역 수준의 노동자 연대와 조합원 가족들과 노동조합이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고할 수 있다. 실제로 2004년 완성차 노조들은 사측과 지역사회공헌기금 출연에 합의한 바 있고, 현재 그 재원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일례로 현대자동차의 경우 2004년 10억 출연, 2007년 20억 출연, 2008년 10억 출연 등으로 지역사회를 위한 기금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재원들이 상당하게 쌓여 있다. 단순한 일회성 시혜에 그치지 않고 그 재원이 지역주민과 노동조합의 연계 강화를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방안을 주도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②사내근로복지기금의 ‘연합기금’화

정부에서는 2006년 사내근로복지기금을 사업장 외에 초기업 단위로 조성·사용 및 확대 적용하는 방안의 가능성을 연구 검토한 바 있다. 또한 노동계에서도 기업복지의 사회화 방안 중의 하나로 사내근로복지기금의 적용대상 확대를 고민하고 있다(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07: 118~9).

정부 측에서 최근 검토하고 있는 연합기금의 운영 방안은 협력기업을 거느린 대기업이 주도적인 위치에 있고 여기에 각 사내하청업체들이 같이 참여하는 방식이다(박찬임·김동배·문무기, 2007). 사내하도급의 원청에서 사내근로복지기금을 운영할 경우 이를 연합기금의 형식으로 하청업체 노동자에게도 복지혜택을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안은 기업복지의 배타성을 완화하여 동일 사업장에서 일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복지격차를 축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동조합에서도 적극적인 고민과 개입이 요구된다. 

이 외에도 정부는 기업별·지역별·업종별·산업별 등으로 하여 2개 이상의 사업주가 출연을 통하여 연합기금을 설립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 방안을 검토하는 이유는 중소기업과 같이 재원 마련이 힘들 경우 몇 개의 업체들이 하나의 기금을 조성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산별노조의 입장에서 이것은 기존 보건의료노조와 금속노조 등에서 2004년부터 제기한 산별연대기금론과 친화성이 대단히 높다. 즉 산별노조 전체를 묶는 광범위 연합기금, 산별 내의 업종을 묶는 중범위의 연합기금, 그리고 원청대기업을 정점으로 하도급계열을 묶는 소범위 연합기금의 형태를 고민해 볼 수 있고, 수평적으로 일정 지역을 단위로 묶는 지역연합기금도 상정해 볼 수 있다. 

특히 금속노조의 경우 2009년에 기업지부의 지역지부로의 재편을 계획하고 있고, 때문에 지역지부의 위상 제고와 활성화 방안에 대한 연구와 준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지역의 동일 업종 사업체들을 하나의 ‘연합기금’으로 묶고 그 속에서 기존의 기업복지 재원 중 일부를 산별복지를 위한 재원으로 재설계하는 방안은 산별노조의 지역 활동을 활성화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현재 사내근로복지기금의 재편에 관한 논의는 정부 내에서도 검토 중인 사안으로 아직까지 그 구체적인 형태와 방식에 대한 결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향후 보다 구체적인 재편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노동조합 특히 총연맹과 산별노조 차원에서 이 연합기금 조성방안 논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산별복지기금의 조성을 위한 제도적 교두보를 마련할 것이 요구된다. 

3) 중장기적 산별복지 시스템

①산별고용안정시스템


산업별고용안정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중장기적 과제다. 초기업적 노동시장 또는 직종별 노동시장이 발달한 산업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산업별 노사관계를 통해 노동시장을 규제한다는 것은 단시간 내에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취업 기반이 기업에 의존하고 종속되어 있는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지 않고서는 산업별 노사관계가 정착되기에는 한계가 존재할 것이다. 

산별고용안정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그동안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금융노조는 2001년에 고용안정에 관한 협약에서 전직 및 창업지원 교육에 합의했었고, 금속노조는 2005년 중앙교섭에서 산업공동화 대책 마련과 산별고용안정시스템 구축에 합의했던 적이 있으며, 보건의료노조도 2007년 단체협약 부속합의에서 산별중앙노사협의회 산하에 고용안정및교육훈련소위원회를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전국건설노조의 경우 지역별로 독자적인 직업능력개발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구체적인 내용은 포함하지 못하고 선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실제 기구의 설립 및 운영에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산업별고용안정시스템이 구축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기능에 대한 재검토가 요구된다. 한국의 경우 노동시장에서 노동력 공급을 통제하는 인력공급조직으로서의 노동조합 기능에 대한 관심이 매우 약하다. 기업별 노동조합은 이미 특정 기업에 공급된 인력들의 조직으로 그 성격상 해고나 실업과 같은 일자리 상실에 대한 보호를 제외하고는 고용이나 숙련 문제에 대한 전체적인 관심이나 노력이 낮은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산업이나 지역에 그 조직의 근거를 두고 있는 산별노조는 고용안정 의제의 기업내부화의 한계를 인식하고 실업의 위험에 대한 산업적/지역적 보호망의 설치에 인적·재정적 투자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선 현행 정부 주도로 운영·관리되는 고용보험에 대해, 기금출연 당사자인 노사단체가 현재보다 운영의 집행책임을 더 많이 맡을 수 있도록 관련 제도 개선 및 정비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또한 산별교섭을 통해 고용안정기금을 추가 조성하고 조합원의 실업 시 고용보험의 실업급여에 추가적인 실업수당을 제공하여, 실업의 위험을 산별노조 차원에서 경감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려해 볼 수 있다. 고용보험 실업급여의 급여대체율이 낮은 수준인 상황에서 산별고용안정기금의 보충은 산별노조 조합원의 실업기간 생계유지에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하여 마련되는 기금을 노조의 주도 또는 노사의 공동 협력과 같은 ‘자치 운영의 원리’ 아래서 관리할 경우 노조의 조직력 강화에 이바지할 것이다. 또한 고용안정기금이 충분히 적립될 경우 보충적 실업급여 지급뿐만 아니라, 직업훈련 및 고용정보센터 등의 건립과 운영 등에도 기금을 투자하여, 보다 높은 수준에서 노동력 공급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할 수 있겠다. 

②산별퇴직연금

노동조합운동이 퇴직연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현재의 퇴직연금제도가 본격화될 경우 그것이 노동자 연대에 미칠 부정적 효과 때문이다. 즉 퇴직연금기금의 수익성 향상을 위해 각종 금융상품에 투자되는 현재의 환경은, 자산적 개인주의가 노동자에게 깊이 침투하고 노동자로서 계급적 위치와 금융상품 투자자로서 지위 간에 생기는 노동자의 자기분열을 낳아, 결국에는 노동자 연대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퇴직연금은 인구의 고령화로 가속화되고 있는 이른바 ‘회색 자본주의’(grey capitalism) 아래서 노동의 집단주의를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할 수 있는 유력한 무대이기도 하다(Blackburn, 1999). 

그런데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현재까지 퇴직연금제도에 대해 민주노총과 금융업종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산별퇴직연금제도의 도입을 검토하는 등 매우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게 현실이다. 대부분의 조직노동은 구래의 퇴직금 제도의 유지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대표적으로 금속노조가 그러하다). 그러나 기존 퇴직금제도로는 노동시장 유연화로 인해 날로 확대되고 있는 비정규직의 노후를 보장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민주노총이 정부의 퇴직연금 도입을 반대하면서도 기존 퇴직금제도를 ‘한시적’으로 유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으로서는 현재의 제도 형성기에 적극적인 개입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기존 퇴직금제도의 유지라는 ‘보수적’ 입장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참여적 개입을 진행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업별기업연금제도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기업연금으로서 산별연금은 “동일한 업종이나 사업에 관련된 독립적인 고용주들에 의해 설립된 연금계획들의 자산을 하나로 묶는 펀드”로 정의할 수 있다. 산별연금의 의의는 고용형태 및 노사관계에 부합한다는 점, 비정규직의 보호와 연대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 노사합의와 노동참여를 통한 연금가입자의 이해를 보호할 수 있다는 점, 가입자와 주주 사이의 잠재적 이해 갈등을 완화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규모의 경제와 같이 연기금 자산운용상의 이점이 있다는 점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2008). 

퇴직연금제도에 대한 노동의 참여는 집단적인 방식, 즉 노동조합을 전제로 할 필요가 있다. 주목할 것은 노동조합의 영향력에 따라 연금제도 참여 형태는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산별연금이 발달한 네덜란드의 경우에도 노동조합의 힘이 약할 경우에는 보험회사 또는 개별 기업연금펀드를 통해서 기업연금이 운영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노동조합의 힘이 강할 경우에는 산업연금펀드를 통해 기업연금이 운영된다. 또 독일과 같이 산별노조의 힘이 강한 경우 산별노조가 산별연금을 직접 운영해 퇴직한 노동자들의 노후를 보장하고 있고, 정부는 지급되는 보험금에 대한 세금면제 혜택을 준다. 미국의 경우에도 팀스터(Teamster) 노조 등은 복수사용자기업연금제도를 도입·운영하고 있는데, 이것은 개별 기업의 단일고용주기업연금과는 다른 법적 규정에 의해 규제되며, 연금계획에 대한 노동의 참여를 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또한 산별퇴직연금은 개별기업 외부로 노동자 노후에 관한 정보가 공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개별기업 노조 차원에서가 아니라 산별노조 등 상급단체 차원의 협상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산별노조의 요구와 협상에 의해 산별연금이 구성될 수 있다면, 이는 단순히 제도 가입자에 대한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차원을 넘어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일례로 스웨덴 모델의 창시자였던 마이드너(R. Meidner)는 스웨덴노총(LO)이 독자적인 투자회사를 만들어 조합원들의 연금계좌를 위탁받고, 이를 통해 노동조합이 부분적으로나마 연기금의 경영권을 확보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이것은 과거 실업보험을 노조가 관리하는 겐트시스템을 통해 스웨덴 노동조합의 힘을 강화시켰던 것처럼, 노동조합의 역량을 새롭게 할 지렛대로서 연금제도 개입을 주목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 산별노조 체제의 초기 단계에서 산별노조의 안착과 역량 강화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시점이다. 여기서 산별퇴직연금제도의 도입과 운영은 산별노조를 강화 발전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전략적 고리이다. 산별노조가 퇴직연금 구성에 대해 사용자와 협상을 진행하고 이를 통해 연기금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다면, 이것은 장기적으로 노동조합의 강화를 낳고 이는 다시 연금제도를 둘러싼 노동자들의 이익을 확대하며, 다시 이것이 노동자 연대성을 강화하는 선순환구조를 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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