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투쟁의 고양과 각국에서 진행된 혁명―반혁명 정세(Ⅲ)

부 제목: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29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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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 목차

제1장 노동자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발생
제2장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운동 전진
제3장 국제노동운동의 출범과 사회주의 이념의 대두
제4장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노동운동
제5장 파리 코뮌
제6장 제2인터내셔널과 식민지 종속국의 노동운동
제7장 20세기 초두 노동자계급 투쟁의 새로운 단계
제8장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
제9장 사회주의 혁명과 국제노동자계급

제10장 세계 노동자계급 투쟁전선의 확대
  제1절 반전 투쟁의 고양과 각국에서 진행된 혁명―반혁명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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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유럽과 동남 유럽 국가들에서 전개된 투쟁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에서 일어난 혁명 투쟁은 인접한 국가들의 해방투쟁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 유럽과 동남 유럽에서의 새로운 국가 출현은 노동자계급 주도의 혁명적 투쟁이 고양되는 가운데 이루어졌죠.

〔폴란드〕

18세기 말 이래 3개 열강 구성에 편입되었던 폴란드 국토의 민족해방운동은, 러시아 10월 혁명이 승리하면서 민족 자결권이 선언되고 소비에트 정부가 특별 포고를 통해 폴란드 분할에 관한 구(舊)러시아 제국의 모든 조약을 폐기함으로써 현실적 기반을 갖게 되었습니다. 
폴란드 국토에서 혁명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던 폴란드 왕국이었어요. 1918년 10월 돈부로바 탄광의 광산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는데, 이것이 총파업으로까지 전화했습니다. 파업에서 제기된 요구는 점령군정과 그들이 설치한 섭정회의 폐지, 의회의 소집, 사회당 지도자의 석방 등이었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편입되었던 폴란드 지역에서는 1918년 10월 말 주민들이 가두에 진출하여 시위와 파업을 벌였으며, 11월7일에는 루블린에서 혁명운동이 고양되는 가운데 좌파 정당 대표들로 구성되는 임시인민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 정부는 폴란드 국가의 창설을 선언했고, 헌법제정의회의 소집과 광범한 민주적 개혁의 실시를 약속했죠. 

11월11일 바르샤바에서는 주민들이 독일 점령군 병사의 무장을 해제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며칠 뒤 바르샤바에서는 ‘노동자·농민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폴란드 민중의 요구는 통일·독립 민족국가의 형성과 민주주의적 개혁 실시를 위한 헌법제정의회 소집, 그리고 정치적, 사회·경제적 개혁으로 집약되었습니다. 

노동자계급은 독자적으로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창설했어요. 이들 소비에트는 8시간 노동일제를 비롯하여 사회적 권리의 시행을 달성했죠.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의 결의를 지지하는 파업운동이 증가했는데, 1918년 10개월 동안에 바르샤바에서 28건의 파업이 일어났으며, 1918년 12월과 1919년 1월 두 달 동안에 12건의 파업이 발생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기업에 대한 통제 방책을 시도했습니다. 이런 파업투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구(舊)노동조합이 부활하고 조합원이 급증했는가 하면, 새로운 노동조합이 출현하기도 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226).

이런 정세 속에서 열린 1918년 12월16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 사회민주당과 폴란드 사회당 좌파의 합동대회에서 공산주의노동자당(PPS)이 창립되었습니다. 대회에서 채택된 당 강령은 소비에트 권력,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투쟁 임무를 제기했죠. 그러나 이 당은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투쟁의 전략과 구체적 전술들을 내놓지 않았으며, 의회 선거 보이콧을 선언함으로써 당의 강령과 정책 목표를 대중들에게 널리 선전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1919년 1월26일 헌법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제헌의회에서 우파를 형성하는 국민민주당, 기독교 민주당이 다수파를 차지했어요. 중도파에 속하는 폴란드 농민당(피아스트파), 좌파 진영에 속하는 폴란드 사회당, 폴란드 농민당(해방파) 등이 소수이기는 했으나 각각 의석을 차지했고요. 당시 폴란드 정당 제도의 특징은 군소정당의 난립 현상이었는데, 정당 수가 20여 개에 이르렀죠. 1919년 2월 제헌의회는 헌법제정에 착수했습니다. 이렇게 새롭게 제정된 헌법에 따라 피우수츠키를 수반으로 하는 부르주아 정부가 수립되었고, 진보적 노동입법을 비롯하여 각종 사회적 법률과 토지개혁 등에 관한 초안이 작성, 실행되었습니다(이정희, 2005: 383~384).

이런 과정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굳힌 부르주아 정부는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파업을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4월1일에는 전국에 걸쳐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같은 해 여름 정부는 소비에트를 해산시켰으며, 노동자 중심지에서 백색 테러가 행해졌죠. 

〔체코슬로바키아〕

1918년 10월31일 ‘국민위원회’ 대표 크라마르와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의회’를 대표하는 베네스가 제네바에서 회담을 갖고 마사릭(Tom Massaryk)을 대통령으로, 크라마르(Karel Kram)를 수상으로 하는 임시 정권 수립을 결정했습니다.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탄생한 것이죠. 임시 국민의회는 11월13일 임시헌법을 승인하고, 그 다음날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선언했어요. 이는 수세기 동안에 걸쳐 외세의 억압을 받아왔던 체코와 슬로바키아 민중들이 벌인 줄기찬 해방투쟁의 결과였습니다. 

노동자계급은 1918년 말에 일련의 경제파업을 감행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파업 투쟁을 통해 그들은 8시간 노동일 쟁취, 노동조합의 권리 승인, 임금인상, 사회보장의 확충 등의 성과를 포함한 새로운 단체협약을 체결했죠. 한편, 국민의회는 출판?집회?파업의 자유를 선언하고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의 확립까지도 약속했습니다. 

이런 정책을 두고, 부르주아 통치자들은 노동대중의 ‘공정한’ 요구를 실현시켜 주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주장했어요. 이런 주장에 동조하여 사회민주당의 우파 지도자들은 사회주의를 향해 큰 폭으로 한걸음 내딛었다고 평가했고요. 또한 계급협조정책을 취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우파 지도부는 새 공화국 강화의 필요성과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점진적 이행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1918년 12월에 열린 당 대회는 “부르주아 정당들과 협력하여 사회개혁을 실시하는 것이 당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228). 

1919년 6월에 실시된 의회 선거에서는 사회민주노동당이 의석의 30.1%를 획득했고, 농민당이 20.5%를, 체코슬로바키아 사회당이 15.6%를, 국민 민주당이 8.2%를 각각 차지했고, 그 외 국가 사회당과 성직자당이 나머지를 차지했습니다. 사회민주노동당의 투사르가 ‘적과 녹’ 연립(사회민주노동당과 농민당, 그리고 국가사회당)내각의 수반이 되었습니다.

사회민주노동당의 이 같은 노선과 정치방침에 대해서 당 내의 반발과 불만이 점차 증대되었으며, 혁명적 부분이 형성되었습니다. 혁명주의자들은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육성하기 위한 신문”이라는 부제를 단 주간지 『사회민주주의자』를 발간했습니다.

이런 정세 아래에서 새로운 혁명적 고양이 시작된 것은 1919년 봄께였어요. 당시 최대 사건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클라드노 광산지역의 노동자 투쟁이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전투적인 사회민주주의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활동가들에 대한 체포와 집회 금지 등에 항의하여 집회와 시위 그리고 대중적 파업이 행해졌죠. 노동자들은 생활의 개선뿐만 아니라 기간산업의 국유화도 요구했습니다. 

1919년 4월19일에는 산업부문 노동자 대표 350명과 여타 노동대중 대표 150명이 ‘노동자 소비에트’를 결성했습니다. 노동자 소비에트는 광산 노동자의 토요 6시간 노동제 도입을 비롯하여 임금인상 요구에 직접 관여했어요. 그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소비에트 활동 가능성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으며, 소비에트 활동은 점점 활기를 잃게 되었죠. 

이런 가운데서도 사회민주노동당 내의 분화 과정은 계속되었는데, 1919년 12월에는 혁명적 분파가 형성되어 마르크스주의 원칙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실행할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 정당 정치가 민족적·국가적 차원에서 정당들의 연립을 바탕으로 사회적 개혁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적·국가적 목표 대신 사회적 목표를 추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과정(이정희, 2005: 402)에서, 혁명적 분파가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가 합스부르크 군주 전제(專制)에서 해방되어 단일 국가를 형성하는 데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밟았습니다. 이는 유고슬라비아 국가가 서로 다른 기원과 역사적 배경을 가진 연방으로 구성된 데에서 비롯된 것이죠. 슬로베니아와 달마티아는 예전 오스트리아 령(領)이었고, 크로아티아는 헝가리의 자치적 속주였으며, 자치주 보이보디나 역시 헝가리 지배권에 있었습니다. 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공동 통치하에 운영되었으며,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독립적 왕국이었죠.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 일부를 획득했습니다(이정희 2005: 451).

이런 복잡한 배경 속에서 부르주아지가 세르비아 왕제파의 비호를 받아 유고슬라비아 국토의 통일을 실현했어요. 1918년 12월1일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연방) 왕국’의 창설이 선언되었습니다. 새로운 국가의 형성은 유고슬라비아 인민대중의 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발전에서의 장해를 제거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죠. 그러나 부르주아지가 지배권을 행사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새로운 형태의 민족적 억압이 행해지게 되었고, 외국 제국주의가 활동을 전개하는 데 유리한 조건이 조성되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민중이 합스부르크 제정체제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국가를 창설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공업중심지에서 발생한 노동자들의 파업투쟁과 농민 봉기, 그리고 병사들의 무장 투쟁이었습니다. 노동자계급은 투쟁을 통해 8시간 노동일, 단체협약 체결, 노동조합의 합법화, 임금인상 등을 요구했으며, 민주주의적 개혁을 위해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1919년 7월에는 노동자계급이 협상국 측과 왕당파가 유고슬라비아 군을 소비에트 헝가리 공격에 투입하려는 기도를 저지했어요. 러시아와 헝가리에 대한 협상국 측의 간섭에 반대하는 항의 파업이 여러 산업에 걸쳐 감행되었죠. 노동자 투쟁의 영향을 받아 군대 내에서도 동요가 발생했는데, 7월22일과 23일에는 바라지딘과 마리보르에서 병사들의 자연발생적인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230). 

한편, 제헌 의회의 성립 이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수많은 군소 정당들이 탄생했습니다. 정당들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크게 영향력을 발휘했던 정당은 급진당과 크로아티아 농민당이었어요. 한편,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전쟁 이전에 사회민주당에서 분리되어 나왔는데,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불법화되어 정부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1919년 4월에는 베오그라드에서 세르비아 사회민주당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회민주당의 주도하에 통일대회가 열렸습니다. 여기에 세르비아, 보스니아, 달마티아의 사회민주당 대표와 크로아티아, 보이보디나 좌파 사회주의자 대표도 참가했으며,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20명의 대표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회는 「통일의 기초」라는 강령적 결의를 채택했는데, 이것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노동당(공산당)’의 결성을 선언한 것이었죠.

이 시기 노동자계급의 당과 노동조합이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1919년 후반에 사회주의노동당은 당원 5만 명 이상을 포괄했으며, 노동조합원 수는 25만 명에 이르렀죠. 1919년 말에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청년동맹이 결성되었어요. 이런 가운데 정부는 노동자계급이 벌이는 파업투쟁의 압력과 국제정세의 영향을 받아, 8시간 노동일법을 도입하는 등 양보의 자세를 취했습니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전개된 사회적 투쟁

〔이탈리아〕

협상국 측의 전승국(戰勝國)들 가운데 가장 약한 고리는 이탈리아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종료와 더불어 이탈리아에서는 혁명적 위기가 막 성숙되고 있었던 거죠. 자유주의 부르주아국가 체제가 거의 마비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종래의 방식대로 국가를 통치하기는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빈자(貧者)의 제국주의’는 내부적인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풍요롭던 북쪽 지역의 황폐, 공업과 운수의 붕괴, 농업의 쇠퇴, 생계비의 상승과 인플레이션, 대량 실업 등은 경제적·사회적·정치적 갈등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더욱이 자본과 이윤을 크게 증대시킨 일바, 안살다, 피아트 등의 거대 기업들은 전시 생산체제를 평상 생산체제로 전환하는 데 따른 모든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지우려 했어요(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235).

이런 위기적 상황에서 1918년 말에는 인민대중이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산업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농업노동자, 영세토지소유 농민, 토지 없는 농민들이 투쟁에 참가했죠. 1919년 봄 ‘공업 3각 지대’(밀라노, 제노바, 토리노)에서 일어난 파업은 특히 완강했는데, 여기서는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가 밀접히 결합되었습니다. 

산업노동자들의 파업 투쟁과 더불어 ‘적색 연맹’에 조직되어 있던 북이탈리아의 농업노동자들도 파업투쟁을 벌였습니다. 남이탈리아와 라치오 주(州)에서 농민의 자연발생적 운동이 일어났고, 특히 지난날 출병했던 병사로서 당시에는 미개간지 또는 불량 경지에 취업하고 있었던 농민들 사이에서도 자연발생적인 운동이 확대되었습니다. 

정부 통계만 봐도, 1919년 파업건수는 1,871건(1918년 대비 6배), 파업참가자수는 155만 5,000명(약 10배 증가), 노동손실일수는 2,200만 일(거의 25배)을 상회했어요. 공업부문에서는 파업의 53.6%, 농업부문에서는 48.6%가 노동자 측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파업을 주도한 것은 섬유, 철강, 금속, 조선 산업 노동자들이었고요. 파업 투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노동조합도 성장세를 나타냈는데, 1919년 말에는 노동조합원 수가 전년 대비 4배나 증가하여 1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한편, 정부는 대중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노동·고용 조건의 개선을 위한 대책들을 내놓았습니다. 또 농민협동조합이 공한지 또는 불경작지를 점거한 경우, 기존 소유자에게 보상을 하는 조건으로 그것이 협동조합의 소유가 되게 하는 포고가 발표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빵 가격이 인하되고 선거권이 확장되기도 했죠. 그러나 전후 이탈리아의 혁명적 정세 아래에서 정부의 이런 개혁이 대중들에게 결코 만족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어요. 선거 결과가 그런 사실을 잘 반영했죠. 

1919년 시행된 의회 선거에서 전통적인 부르주아 정당이 크게 패배하여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의석을 상당수 잃게 되었던 겁니다. 그들은 전체 의석의 36%를 획득하는 데 그쳤죠. 민주주의적 개량을 표방했던 가톨릭 인민당은 의석의 약 20%를 차지했습니다. 최대의 성과를 거둔 정당은 이탈리아 사회당으로 175만 6,000표를 획득하여 의석의 30% 이상(499석 가운데 156석)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민대중이 혁명적 운동을 전개하는 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죠.

그런데 노동자와 인민대중의 투쟁을 이끌고 지원해야 할 진보정당 또는 좌파정당은 통일적이지 못했어요.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아마데오 볼디가 그룹은 개량주의자의 즉시 추방을 줄기차게 요구하면서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를 선전함과 동시에, 의회 보이콧과 소수의 ‘순수한’ 정당 창설을 요구했습니다. 반면 에기디오 젠나리-마라비니-미시아노 그룹은 개량주의와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좌파의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죠. 

또 다른 그룹으로는 안토니오 그람시가 주도하는 좌파 사회주의자 그룹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여기에는 팔미로 톨리아티와 움베르토 테라치니 그리고 안젤로 타스카 등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이 그룹은 1919년 5월1일부터 토리노에서 주간지 『신질서』(Ordine Nuovo)를 발간했습니다. 이 신문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이론적·실천적 문제들을 제기했고, 레닌의 논문이나 코민테른의 자료를 게재했습니다. 

그람시는 1919년 6월에 쓴 논문 「노동자민주주의」(톨리아티와 공동 집필)에서 이탈리아의 경우, “직장의 모든 권력을 직장위원회에!”, “국가의 모든 권력을 노동자·농민 평의회에!”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투쟁을 전개할 것을 제안했어요. 그람시는 공장평의회를 목표로 한 투쟁을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이 투쟁을 통해 스스로 ‘진정한 노동자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죠.

그람시는 공장평의회가 세 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①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 ②노동대중의 자기관리, ③권력의 획득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또 공장평의회의 발전이 이탈리아에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 확보와 사회당 내에서 프롤레타리아적?혁명적 요소의 우위 장악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람시는 권력을 추구하는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는 구래의 이데올로기적 관계 내부에서 자신의 선진적인 이데올로기를 주장하고, 한 나라의 정치, 경제생활 내에서 이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을 강화시켜, 정치권력을 장악한 이후에 맡겨질 자신의 지도적 역할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한국철학사상연구회, 1989: 183). 

〔프랑스〕

프랑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자,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여러 가지 현안들은 조속히 해결되고 파괴된 것은 별 어려움 없이 복구될 것이며, 인민의 물질적 상태는 패전국 독일의 희생을 바탕으로 개선될 것이라는 환상이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상은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했죠. 

공업과 농업의 생산 회복은 완만하게 진행되었고 대내외 채무는 증대되었으며, 프랑의 환시세는 떨어졌고 인플레이션은 사태를 악화시켰습니다. 식료품을 비롯한 생활필수품 가격은 1919년 초두에 전쟁 이전 수준의 3배 또는 4배 정도로 상승한 반면, 노동자의 임금은 1913년 수준에서 동결되었죠. 조세가 두드러지게 증가했는가 하면, 여성들의 실업이 특히 급증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1919년 봄에는 대중투쟁이 격화되었어요.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8시간 노동일의 확립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로렌에서 광산 노동자 1만 명이 파업을 결행했고, 3월29일에는 조레스 암살범에 대한 무죄 판결에 항의하여 파리 시민 15만 명이 시위를 벌였습니다. 4월에는 파리의 봉제 노동자들이 일손을 멈추었고 은행원들이 파업을 단행했죠. 지배층은 이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일정한 양보를 수행했는데, 3월에 의회가 단체협약에 관한 법률을 채택했고, 4월에는 8시간 노동일제법을, 7월에는 직업교육법을 통과시켰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239).

1919년 메이데이 때는 모든 대공업 중심지에서 노동자들이 24시간 파업투쟁을 전개했어요. 파리에서는 정부 당국의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시민 50만 명이 가두시위에 참가했으며, 경찰대와 충돌 과정에서 쌍방에 수백 명의 부상자가 생겼죠. 5월25일에는 파리 코뮌을 기념하여 페르 라셰즈 묘지를 향해 진행되는 행진이 열렸습니다. 

파업의 물결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7월에는 최고조에 이르렀으며, 파업 참가자수는 50만을 넘어섰습니다. 센 에 마른 지역에서는 농업노동자들도 투쟁에 참가했어요. 정부 통계에 따르면 1919년에는 파업건수 2,026건, 파업 참가자수 115만 1,000명, 노동손실일수 1,500만 일 이상으로, 사상 최고기록을 나타냈죠. 파업투쟁에서 앞장선 노동자는 기계제조 노동자와 금속 노동자였으며, 건축 노동자와 운수 노동자 그리고 광산 노동자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파업은 절반가량이 타협을 통해 종결되었고, 4분의 1 조금 모자라는 정도로 노동자 측이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나머지는 패배로 끝났습니다. 노동자들은 평균 20~25% 정도의 생계비 인상분을 획득했고요.

노동자계급이 벌인 거센 파업투쟁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1919년 치러진 의회선거에서는 부르주아 정당들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새로운 선거제도는 연합을 구성할 수 있는 정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죠. 이는 부르주아 정당에게는 성공적인 영향을, 반면에 좌파에게는 절망적인 영향을 끼쳤어요. 사회당은 1917년 ‘신성동맹’과 결별한 이후 고립되었고, 내부적으로도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방침을 둘러싸고 분열되어 부르주아 정당들과 어떤 종류의 타협도 거부했던 거죠. 선거 결과를 보면, 사회주의자들이 차지한 득표 비율은 17%에서 21%로 증가했음에도 이들이 차지한 의석수는 오히려 102석에서 68석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중도우파 정당들은 총 616개 의석 가운데 450석을 차지했죠(프라이스, 2001: 292~293). 

사회주의 정당이나 노동조합운동 내부에서는 이념과 노선상의 대립과 갈등이 점점 확대되는 양상을 나타냈습니다. 이 같은 정파 사이의 분열과 대립은 1920년대 초두 노동운동의 침체를 심화시킨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죠. 

〔영국〕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의 부르주아지는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을 교묘히 이용했어요. 로이드 조지 연립내각은 몇 가지 개혁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선거권의 재산제한 철폐, 선거연령의 인하, 여성의 상당 부분에 대한 참정권 부여, 교육제도 개선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전후 1918년 실시된 의회선거에서는 보수당과 자유당의 연합세력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연합세력은 500만 표를 넘게 획득하여 보수당 338석, 자유당 146석을 차지했죠. 노동당은 250만 표를 획득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선거제도의 비민주성 때문에 하원에서 57석밖에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정치 정세의 변화와 더불어 계급 사이의 갈등이 첨예화되었어요. 1919년 1월 스코틀랜드 공업지구 클라이드 기계제조 노동자 10만 명 이상이 노동조합 지도부의 승인 없이 현장위원과 노동자위원회의 지도하에 파업을 결행했습니다. 1월31일 글래스고 조지 스퀘어에서 행해진 시위에서는 파업 노동자와 경찰대 사이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는데, 노동자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항했고, 정부는 파업 지도자들을 체포함과 동시에 전차와 포병대를 시내에 투입했죠.

한편, 탄광 노동자 100만 명이 투쟁을 감행할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일의 단축뿐만 아니라 탄광의 국유화와 노동자 통제의 확립을 요구했어요. 로이드 조지 정부는 몇 가지 책략을 동원했는데, ‘산키 위원회’(산키 판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위원회)를 설치하여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파업을 연기시켰으며 드디어는 노동조합 3자 동맹 ―탄광, 철도, 운수 세 노동조합의 연합― 지도부의 도움을 받아 파업을 중지시켰죠.

정부 통계에 따르면, 1919년의 파업건수는 1,352건, 파업참가자수는 259만 1,000명, 노동손실일수는 3,500만 일이었습니다. 파업의 압도적 부분이 노동자 측의 완전 또는 부분적 승리로 끝났고요.

노동운동이 고양되는 가운데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여러 혁명 조직들이 조직적 통일을 모색했습니다. 1919년 여름 이들 조직은 단일의 공산당 결성에 대한 협의를 시작했어요. 이런 조직들 가운데 가장 유력했던 정당은 영국 사회당(BSP)이었는데, 이 당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견지했죠. 사회주의노동당(SLP)은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들이 주도한 정당으로서 현장위원 운동을 지도했는데, 이 운동은 가장 전투적이고 계급의식을 갖춘 노동자와 개량주의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노동자들의 호응을 받았습니다. 노동자사회주의연맹(WSF)은 노동여성 참정권 조직으로 출발하여 성장했습니다. 남 웨일스 사회주의협회(SWSS)는 혁명적 노동조합이 지도하는 대중적 혁명투쟁을 주장했고요.

조직의 통일에 관한 협의에 참가한 조직들은 혁명조직의 원칙과 목적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된 견해를 보였으나, 전략과 전술에 대해서는 특히 노동당과 의회주의에 대한 방침에서는 상이한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영국 사회당은 노동당에 가입하는 것은 불가결한 조건이라는 견해를 밝히면서 혁명적 의회주의를 주장했죠. 사회주의노동당은 의회 내에서 활동을 펴는 데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노동당에 가입하는 것은 반대했고요. 노동자사회주의연맹과 남 웨일스 사회주의협회는 단호한 반의회주의 주장을 폈습니다. 이런 의견의 불일치를 극복하는 데는 1년이 넘게 걸렸어요(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242).

〔미국〕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의 노동자계급은 노동?생활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사회적 격차의 첨예화, 착취의 증대, 실업, 물가등귀는 러시아와 서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발생한 혁명적 사건들의 영향과 맞물려 새로운 계급적 갈등을 촉발시킨 원천이 되었죠. 이런 가운데 파업운동이 급증했어요. 1919년의 파업건수는 3,630건이었고, 파업참가자수는 416만 명으로서 피고용자 총수의 20.8%였습니다.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때로 종래의 틀을 뛰어넘는 요구와 슬로건을 제기했는데, 이를 테면 작업제도나 작업조직, 고용과 해고, 직장장(職場長)의 임명, 경영합리화 등에 관한 사항의 결정에 대해 노동자 참가를 요구하기도 했죠.

1919년 초에는 전국에서 총파업의 기세가 강했습니다. 1월에 시애틀 항의 조선 노동자들이 임금인상과 8시간 노동일 그리고 주 44시간 노동을 요구하여 일손을 멈추었어요. 다른 직종의 노동자들이 그들을 지지했으며 파업 참가자는 6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2월6일부터는 시 전체에 걸친 파업이 감행되었죠. 총파업위원회가 이 투쟁을 지도했으며, 급수, 조명, 병원의 확보, 급식소의 조직, 사회질서의 유지 등의 문제들도 위원회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시애틀의 노동자 총파업에 대해 정부, 의회, 미국노동총연맹(AFL)의 지도자들의 강력한 압력이 가해졌고, 그 결과 2월11일 총파업은 중지되었으나 조선 노동자 3만 5,000명은 약 한달 동안 파업을 계속했습니다. 많은 노동자와 노동조합 활동가가 체포되었죠.

이 시기에 일어난 또 하나의 대규모 파업은, 미국 최강 독점체의 하나였던 유에스 스틸(U.S. Steel)의 노조 결성 방해에 대한 철강노동자의 완강한 파업 투쟁이었습니다. 이 파업은 1919년 9월에 시작되어 70군데로 확대되었고, 파업참가자는 36만 5,000명에 이르렀으며, 철강, 탄광, 화부(火夫), 기계공 노동조합의 대표들로 구성된 ‘시카고 전국위원회’가 이 파업을 지도했습니다. 파업에서 제기된 주요 요구는 임금인상과 노동조합 승인이었죠.

정부는 철강노동자의 파업에 대해 공권력을 동원해 파괴하려 했고, 펜실베이니아 주에서는 노동자와 경찰대·회사 고용 폭력단 사이에 유혈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전국위원회는 1920년 1월에 열린 회의에서 파업 중지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 이유는 AFL 지도자 곰퍼스와 직종별 노동조합 지도부가 파업노동자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탄광 노조나 철도 노조도 철강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충분한 연대를 하지 못하게 되면서, 파업은 결국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245). 

1919년 여름과 가을 탄광노동자들은 탄광 국유화 요구를 내걸고 파업을 단행했습니다. 미국 통일탄광노조 대회는 탄광주의 소유를 ‘민주적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죠. 1919년 11월에 결행된 총파업에는 탄광 노동자 40만 명 이상이 참가했어요. 파업 노동자들은 60%의 임금인상과 주 30시간 노동, 시간외 수당 지급 등을 요구했죠. 연방재판소는 파업을 위법으로 규정했고, 곰퍼스를 비롯한 노조 간부들도 파업 중지를 종용했습니다. 그러나 파업이 끝난 것은 14%의 임금인상에 이어 타협적 협정이 체결된 1920년 1월7일이었어요.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1918년에서 1922년에 걸쳐 감행된 노동자계급의 파업투쟁은 독점자본가와 정부의 탄압으로 절망적일 정도로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AFL의 지도자들은 노동자계급을 철두철미 배반했어요. 그들은 특정 산업의 노동조합들이 맹렬한 자세로 파업하고 있는 동안에도 자신들의 직종별 노동조합 활동을 체계적으로 고수했습니다. 그들이 취한 정책은 퇴각 정책으로서 그 하나하나가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죠. 또한 그들은 고용주의 맹공 앞에 비굴하게 도주했습니다(Foster, 1956: 258).

〔비참전국〕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지 않은 국가들에서도 전쟁으로 인한 격변이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촉진했습니다. 몇몇 나라들에서는 러시아 10월 혁명의 사상과 유럽 중앙부의 혁명운동 영향을 받아 자립적인 정치투쟁을 과감히 전개했죠. 

중립국 네덜란드에서는 노동조합과 병사평의회가 사회?경제 개혁을 요구했으며,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사회보험제도 개선, 여성에 대한 선거권 보장 등의 요구를 제기하면서 파업을 벌였습니다. 에스파냐에서는 에스파냐 사회주의노동당과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 계열의 전국노동연합(CNT)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제국주의적 봉쇄에 반대했으며, 파업운동을 강화했습니다.

포르투갈에서는 정부와 노동자 조직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포르투갈 노동조합 연합이 총파업을 선언했어요. 많은 노동조합 활동가, 주로 철도노동자와 농업노동자가 투옥되거나 아프리카 식민지로 추방되었습니다. 파업은 실패로 끝났지만, 파업 투쟁은 파이스 독재를 무너뜨리는 데 큰 기여를 했죠. 또 1919년 겨울의 군주주의자 반란을 격파하는 데도 노동자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고요. 리스본에서 벌어진 대중적 시위와 군주주의자들 사이의 전투에서 노동자들의 직접적 참가는 군주제의 부활을 저지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일시적이나마 구제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19년 스칸디나비아 3국에서는 파업투쟁이 강화되었습니다. 이렇게 스칸디나비아 노동자들이 벌인 대중운동의 결과로서 약간의 경제적?정치적 성과가 달성되었죠. 8시간 노동일이 제정되었으며, 스웨덴에서는 산업재해에 대한 기업주 부담의 강제보험제도가 도입되었고, 노르웨이에서는 2주간의 휴가제가 시행되었습니다. 덴마크에서는 국가대부를 조건으로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에 대해 경영용지의 무상 인도가 법률로서 행해졌고요(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4 volume 4: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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