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해병대 전우회가 만들어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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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소식이 뜸했던 후배한테서 아주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던 후배는 아버지의 권유로 해병대를 지원했다고 한다. 이제 훈련이 끝나고 초임장교 부임을 앞뒀다는 그는 다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2차 파병’이 결정되면 이라크에 가게 될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이제 2차 파병이 확정됐으니, 그 친구는 비판 사회학을 공부하느라 닦은 영어 실력 때문에 남의 나라 전쟁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처량한 신세가 될지 모르겠다.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서야 안 되겠지만, 이번에 2차 파병되는 많은 젊은이들이 혹시 끔찍한 일을 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부는 꼭 이라크 파병을 ‘농촌 봉사 활동’가는 것 정도로 선전하곤 하는데, 지금 이라크가 전쟁이 한창인 사지(死地)라는 것은 명백하다. 지금 정부는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고, 그것을 우리들도 사실상 방조했다. 만약 이라크에서 ‘전사 통지서’라도 날라 오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군대가서 사람 안 된다

별 생각 없이 군대를 다녀온 나는 입대를 앞둔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대체복무를 권해왔다. 아무리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봐도 군대에서 보낸 시간 동안 잃은 게 얻은 것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다. 신체검사 결과와 상관없이 약 7만여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 약간의 준비를 통해 산업기능요원이나 전문연구요원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대체복무를 해 왔으니, 아무런 준비 없이 군대를 다녀온 것은 그다지 똑똑한 일은 아니다. 간혹 기간을 들먹이면서 대체복무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것은 군대를 경험하지 않은 이들의 ‘잘 모르는 투정’일 뿐이다.

주변 사람들의 입대가 특히 달갑지 않은 이유는 2년이 넘는 군대 생활이 단지 시간을 허비하는 수준을 넘어 ‘사람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다. 군대 생활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군사 문화’가 몸에 각인돼 나중에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당사자가 되곤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초ㆍ중ㆍ고등학교를 거치면서 학교에서 받은 ‘군대식 교육’이 군 생활을 통해 더욱더 강화되고, 나중에는 직장으로 이어져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는 것이 정확한 얘기일 것이다. 박노자 교수는 예비역이 된 남학생들의 성격과 언행의 변화를 자세하게 관찰한 뒤 느낀 안타까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잘 안 보이는 그 변화가 러시아에서 귀화한 박 교수에게는 아주 생생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이렇게 몸에 한번 각인된 ‘군사 문화’는 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눈에 띄는 몇 가지 일만 떠올려 봐도 이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몇 해 전 ‘군가산점 위헌 판결’이 내려졌을 때 예비역들의 그 원인 모를 분노 표출은 좋은 예일 것이다. 평소 자기 삶에 직접ㆍ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법령 수십 개가 국회에서 통과될 때도 나 몰라라 하던 많은 예비역들은 군필자 중에서 극히 일부의 이해관계와 맞닿아 있는 이 문제에 대해 말 그대로 ‘떨쳐 일어났다.’ 그것도 정작 위헌 판결을 내린 법원이 아닌 소송을 제기한 해당 여학생들의 학교를 대상으로 말이다.

이것이 단지 해프닝이었다면, 최근의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를 둘러싼 예비역과 시민들의 무관심과 냉대는 군대 경험과 몸에 각인된 군사 문화가 사회의 체질을 바꾸는 데도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은 ‘상식’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의 돌출 행동으로 폄하되어왔던 양심적 병역 거부는 2001년 오태양 씨가 불교신자로서 병역 거부를 선언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적으로 토론되기 시작했다. 오태양 씨 이후로 13명이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언했고, 특히 지난 5월21일에는 서울남부지법의 이정렬 판사가 여호와의 증인 신자 세명의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상급심에서 그 결과가 뒤바뀔 수 있지만 의미 있는 판결임에는 틀림없다. 반세기 동안 토론 자체가 금기시됐던 병역 의무에 대해서 현행 법 논리로 그 보완의 필요성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정렬 판사 본인은 특전사에 자원해 군 복무를 마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병역 거부’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판사는 단지 “법대로 판단했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것은 이 판사의 판결문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판사는 판결문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한해  6백명 안팎으로 연간 징병 인원 30만명의 0.2%에 불과해 국가 방위력에 영향력을 미치는 정도가 미미하고, 현대전은 인해전술식의 전술이 더 이상 안 통해 이 정도 징병 인원이 감소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며 “이들을 전쟁에 참가시킨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도움이 안 될 게 뻔하기 때문에 향후 대체복무제를 도입해 병역 의무와 동일하거나 더 중한 내용을 시키는 것이 더 낫다”고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했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동감할 명료한 이 판결은 우리나라와 안보 상황이 비슷한 대만이나 준(准) 전시 상황인 이스라엘의 사정을 알고 나면 더욱더 수긍이 간다. 대만은 지난 2000년부터 대체복무제를 실시하고 있다. 독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등에 이은 결정이다. 중국과 대치하면서 현재 2천3백만의 인구에 30만의 군대를 유지하고 있는 대만이 도입한 대체복무제를 4천8백만의 인구에 69만의 군대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 여호와의 증인 신도의 병역거부에 대해 무죄판결이 내려지자 일부 재향군인들이 거리로 나섰다.   - 출처:한겨레21 ]

전쟁국가 이스라엘 청년들의 ‘선택적 병역거부’

이스라엘의 상황은 더 많은 시사점을 준다. 1940년대부터 총 다섯 번에 걸쳐 아랍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현재 팔레스타인을 강제 점령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18세 이상의 남녀 모두가 각각 3년과 1년9개월의 병역 의무를 지고 있다. 남성은 병역을 마친 뒤에도 45세까지 매년 1개월을 예비역으로 군복무를 해야 한다. 물론 이런 ‘전쟁 국가’ 이스라엘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할 리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에는 많은 징집 대상자와 예비역들이 ‘선택적 병역 거부’ 운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불가피한 ‘방어 전쟁’이 아닌 ‘공격 전쟁’이나 팔레스타인 주민을 강제 점령하는 것과 같은 반인륜적 작전에 동참하라는 명령을 군인들이 조직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운동은 1970년부터 시작돼 현재는 1천여명 이상이 처벌을 감수하면서 선택적 병역 거부에 동조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나라 인구로 환산해보면 약 1만여명에 가까운 숫자다. 재미있는 것은 이스라엘 군 당국은 파장이 확산될 것을 우려해, 이들 병역 거부자에게 40여일 정도의 금고형과 같은 최소한의 제재만 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1만여명이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언한다면 그 파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이정렬 판사의 판결 소식이 전해진 뒤, 우리나라의 상당수 예비역과 시민들은 이 역사적 판결을 한 판사의 ‘돌출 행동’으로 폄하했다. 그간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서 ‘신종 병역 기피’라고 매도해 온 정황을 염두에 둔다면 이해 못할 반응도 아니다.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이런 반응이 바로 젊은이들을 ‘더러운 전쟁’으로 보내는 파병 결정과 동전의 양면이라고 하면 무리한 생각일까?

평화국가 거부하는 재향군인들의 ‘시민단체’

한국의 시민사회를 크게 보수적 영역과 진보적 영역이 경쟁하는 장으로 본다면, 보수적 영역 중에서도 가장 강고하고 핵심적인 부분으로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그 중 하나가 빨간 십자가를 들고 “불신 지옥, 예수 천당”을 외치면서 ‘빨갱이 잡는 집회’에 신도들을  동원하는 일부 보수적 교단이라면, 다른 하나는 바로 지역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해병대전우회’일 것이다.

해병대전우회는 대북 화해협력 정책에 계속 반대해 왔을 뿐만 아니라, 이라크 파병 결정에 대한 찬성 여론몰이를 하는 데도 적극적인 역할을 해왔다. 더구나 해병대전우회는 ‘단기사병’ 출신인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에게 ‘명예 해병’ 자격을 주는 등 정치권의 보수적 의원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최근 미국 대사관에 마련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분향소에 다녀간 극소수의 단체 명단에 해병대전우회가 올라가 있다는 것은 그 단체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해병대전우회는 지역 사회에서 순기능을 하기도 한다. 종종 그 단체는 지역의 청소년 범죄를 막는 것과 같은, 애초 보수적 가치에 기반을 둔 단체에 어울리는 일에 나서기도 하고, 가끔은 환경단체의 가장 충실한 동반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앞에서 지적한 양심적 병역 거부나 파병 반대 움직임처럼 우리 사회의 질을 ‘전쟁 국가’에서 ‘평화 국가’로 바꾸는 데 해병대전우회가 큰 장애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민주 해병대전우회’가 현실화된다면

그럼 어떻게 이 강고하기만 한 보수적 영역의 핵심에 균열을 낼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바로 해병대전우회에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조합원들도 포함된다는 데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다. 찾아보면 알게 모르게 해병대 출신이 많을 텐데 이들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민주 해병대전우회’를 만들면 어떨까?

‘민주 해병대전우회’가 앞장서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에 의견을 표명하고,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고 나선다면 그 자체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지난 탄핵 정국 때 부산의 일부 해병대 출신 대학생들이 역시 해병대 출신인 한나라당 홍사덕 의원의 행태를 비판하는 시위를 해 눈길을 끌었던 적도 있다. 민주 해병대전우회가 ‘뜬다면’ 동참할 노동자, 지식인, 학생들이 적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민주 해병대전우회는 한 가지 상징적인 대응에 불과하다. 전쟁 국가를 넘어 평화 국가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힘든 길을 가야할 테고, 그 안에서 극복해야 할 어려움은 훨씬 더 많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 그런 평화 국가를 만드는 길에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이라크 반전 평화팀’의 일원으로 이라크를 찾아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증언했던 작가 오수연 씨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전쟁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 노동자들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전쟁이란 미사일이 쿵쿵 떨어지는 순간만이 아닙니다. 전쟁 때문에 삶이 비틀리고 질식당하는 모든 과정이 전쟁입니다. 외국군은 침략군이 될 수밖에 없는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는 한국도 전쟁국가이며 우리도 전쟁 중입니다. 그런데도, 의문조차 갖지 않고 전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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