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복지국가의 꿈, 증세 논의로 부활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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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시작된 새로운 정부가 첫 연말을 맞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를 두고 ‘약속은 지키는 정치인’이라고 강조했던 만큼 공약을 이행해 주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한 해를 돌아보니 올해 정치권의 핵심 키워드는 ‘공약파기’일 것으로 전망된다. 
 
복지국가 기대 안고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
지난 2012년 12월의 대선 당시 한국 사회에는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 열풍이 일었다. 그 배경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재벌 대기업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기업 건설사들의 이익을 위해 4대강 공사에 천문학적 비용을 들이면서 국가 재정위기를 심화시켰고, 각종 사회적 특혜로 성장한 재벌기업은 동네 골목상권에 무차별적으로 진출해 자영업자들의 고통을 심화시켰다. ‘갑(甲)’인 대기업의 중소기업 쥐어짜기 횡포도 사회적으로 부각되었으며, 무상급식에서 희망을 경험한 서민들은 여전히 힘든 삶으로 인해 복지정책 확대를 열망했다. 그래서 사회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대안으로 복지국가 모델이 떠올랐다. 이 같은 현상을 반영하듯 서점가에서는 스웨덴을 비롯한 서구 복지국가에 대한 책이 판매순위 상위권을 달렸다. 
지난 대통령 선거는 그러한 열망을 실현시킬 능력 있는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표출된 선거였다. 여야 후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복지 확대와 경제민주화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 이미지를 강조한 박근혜 후보는 복지국가 실현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취임 첫해가 다 지나가는 지금,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은 노동·검찰개혁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후퇴하고 있다. 특히 주된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의 경우 일감 몰아주기 규제 강화, 대기업의 골목상권 진출규제, 대기업 불공정행위규제와 같은 거의 모든 항목의 이행이 경제상황과 기업 투자 활성화를 핑계로 축소·지연되고 있다. 재벌기업 경영권 승계의 핵심 고리인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의 경우 관련 핵심 법안이 이번 정기국회에서 다뤄질 예정인데, 지금까지의 태도를 보면 과연 정부가 공약 이행의 의지를 보일지 의심스럽다. 만약 박근혜 정부가 지금처럼 재벌의 불공정행위, 탈법적인 성격의 비자금과 순환출자 및 내부거래를 근절하기 위한 경제민주화 법안은 계속 거부하면서, 몇몇 대기업을 손보는 방식으로 재벌 길들이기에만 열중한다면 경제민주화 공약은 속빈 공약(空約)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취임 첫해부터 파기된 복지공약 
복지공약은 약속파기의 정도가 더 심각하다. 단순 파기문제가 아닌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였다는 ‘공약 사기’ 문제가 큰 논란이 되고 있다.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는 4대 중증질환 진료비 전액 국가부담, 고교 무상교육, 반값등록금 등의 복지공약과 함께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 대한 월 20만원씩 기초노령연금 지급을 핵심공약으로 제시했다. 4대 중증질환 진료비의 경우 100% 건강보험에서 지급하겠다는 것이 공약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선거 캠프에서 국민행복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공약을 총괄했던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올해 3월 국회 장관인사청문회 과정에서 “4대 중증질환 진료비 중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비, 간병비와 같은 비급여 부분은 처음부터 공약에 포함이 되지 않았고, 선거 당시에도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해서 파문을 일으켰다. 비급여부분 지급이 공약의 핵심이었음을 고려하면, 처음부터 국민을 속인 허위공약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기초연금의 경우 얼마 전 보건복지부가 입법예고한 기초연금법 제정안에 따라, 국민연금과 연계해서 소득 전체의 0~70%까지에 해당하는 65세 이상 노인에게 국민연금 가입 기간에 따라 10~20만원을 차등 지급하게 된다. 그러나 애초 공약은 기초연금법 제정 즉시 65세  노인 누구에게나 20만원을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공약파기 논란이 커지자,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9월 국무회의에서 기초연금 공약 수정과 관련하여, “어른신들 모두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결과에 대해 죄송한 마음”이라면서 “세계경제 침체와 맞물려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세수부족과 재정건전성의 고삐를 쥐어야 하는 현실에서 불가피했다”고 사과했다. 경제 상황이 악화돼서 불가피하게 공약을 이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 후보의 공약자료집 중 기초연금 도입에 대한 공약>
 
그러나 공약을 자세히 살펴보면 처음부터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으로 20만원 전액을 지급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선 공약집에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을 통합 운영하겠다는 계획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즉 박근혜 대통령의 기초연금 공약은 설계할 때부터 모든 노인에게 동일하게 20만원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연금과 연계해서 차등지급하겠다는 것이 속내였다. 그러면서도 거리마다 플래카드를 걸어 모든 노인에게 즉시 2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선전했으니,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20만원을 즉시 받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공약 사기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후보가 이렇게 버젓이 허위 공약을 발표하고, 당선 후에는 ‘공약 다 지키는 대통령 보았느냐’는 식으로 우긴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심지어 아무런 제재와 제대로 된 혹평마저도 받지 않는데다가, 이런 강짜부리기가 통하는 우리 정치현실이 서글프기 그지없다. 
 
노후보장체계 흔드는 기초연금 공약 후퇴
기초연금 20만원 지급은 국민연금과 별도로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우리 부모 세대가 나라에서 나오는 국민연금 20여만 원과 기초연금 20만원을 받아 노후 내내 월 40만 원 정도의 소득이 보장된다고 상상해 보자. 자가 소유상태라면 부부 두 명이 월 80만 원의 소득과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아 최소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자녀 교육비와 비싼 주거비 부담에 눌린 자녀 세대도 부모에 대한 부양 부담을 한층 덜게 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일찍부터 각 나라에 기초연금, 기업연금 그리고 개인연금으로 구성된 다층연금체제로 국민들의 노후 보장책을 마련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즉 정부가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기초연금, 기업이 보장하는 퇴직연금, 개인이 사적계약으로 보험을 들어 보장하는 개인연금을 활성화하여, 이 연금들이 겹겹이 쌓인 패스트리 빵처럼 노후를 튼튼히 보장할 수 있도록 노령사회로의 이전을 준비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초고령 사회에서 어느 한 주체가 노인의 긴 노후를 완전히 짊어진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OECD의 권고는 매우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법에 명시된 기초노령연금 상향 지급 약속은 지난 2007년 기초노령연금법 제정 때 정해진 것으로, 오는 2028년에 달성되게 되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로 약속한 것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새로 도입할 예정인 기초연금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현행 기초노령연금은 65세 이상의 노인 중 월 소득액과 개인의 자산 가치를 합해서 계산한 소득인정액이 상위 30%인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70%에게 정부가 연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이 기초노령연금은 2007년 노무현 정부가 재정부족을 이유로 국민연금 지급액을 낮추는 연금개혁을 진행하면서, 국민들의 반발을 낮추기 위해 국민연금 가입 여부와 무관하게 지급하는 기초노령연금을 신설하기로 타협하면서 도입됐다. 올해는 월 83만 원 이하의 소득인정액 노인들에게 지급되고 있으며, 2012년 지급자 수는 390만 명에 이른다. 올해 기준으로 기초노령연금 지급액은 소득인정액에 따라 노인 1인당 월 2만원에서 최대 9만원까지고, 이 금액은 2007년 도입 당시 국민연금 전체 가입자 평균소득액의 5%를 기초노령연금액으로 규정한 법에 따른 것이다. 국민연금 가입자의 평균소득액이 매년 올라가기 때문에 기초노령연금액도 매년 조금씩 오르기는 하지만 삶을 영위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기초노령연금법은 2007년 부칙에서 이 연금액을 2028년까지 단계적으로 인상한다고 규정하고, 인상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국회 내에 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공적 노후소득제도는 65세 이상 소득 하위 70%의 노인이면 누구나 지급받는 기초노령연금과 국민연금 가입자라면 지급받는 국민연금 등 총 2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부는 앞으로 노령사회를 대비하기 위해 국민연금 가입을 늘리고, 기초노령연금액을 법에서 정한 대로 올려나가면 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이러한 두 개의 층으로 보장된 국민연금과 노인기초연금을 뒤섞어 서로 영향을 미치게 만들었고, 국민연금 대량 탈퇴 사태를 불러왔다. 결국 노인들의 노후보장체계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기초연금 공약 후퇴는 공약을 지키면 좋고, 안 지키면 아쉬운 수준이 아니다. 법에 보장되어 있던 노인의 수급 권리를 일부 박탈한 것이다. 이러한 박근혜 정부의 악행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국회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국회는 지난 2007년 분명히 2028년까지 기초노령연금액을 올리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기로 부칙까지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국회는 그 동안 기초노령연금 논의에 대해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 
 
사회복지세 도입해 복지국가 토대 마련해야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박근혜 정부가 기묘한 공약 이행방안을 내놓은 것은 증세 없는 복지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노인의 권리를 축소할 것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재원 마련 방안을 준비해야 한다. 이 재원 마련 방안은 결국 증세를 의미한다. 또한 여당은 책임감을 가지고 재원을 마련해야 하며, 야당은 더 이상 ‘부자감세 철회’라는 지나간 대의명분에 집착하지 말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아울러 정부는 조세도피처나 차명계좌 및 고소득자영업자 탈세와 같은 우리사회에 만연한 탈세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병행해야, 국민들에게 증세의 필요성을 설득할 수 있다. 
증세방안은 여러 가지가 있다. 부자증세론도 타당성이 있으나, 이 글에서 소개하려는 방안은 소득별 증세의 일종인 사회복지세 도입이다. 사회복지세는 지난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 당시 대통령 후보가 처음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사회복지세 논의는 지난 10년간 다듬어지고 지금은 상당히 진척돼 관련 법안이 국회에 발의되어 있다. 
사회복지세는 기존의 소득세와 법인세 등 직접세에 부가세(Sur Tax) 형식으로 단일 세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복지 목적세다. 즉 복지에만 사용하는 특별계정을 만들어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미 도입한 목적세인 교육세나 농어촌특별세, 또는 이명박 정부 때 논의되었던 통일세와 유사한 구조를 갖는다. 
특히 사회복지세는 소득세와 법인세처럼 소득액이 많을수록 세율이 더 높아지는 누진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사회복지세로 세율을 1% 올려 일반 직장인이 세금을 1만원 더 낸다고 가정할 경우, 최상위 소득구간에 속하는 사람들은 수십 배 이상의 세금을 내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복지세는 보편 증세의 성격을 갖고 있는 만큼, 고소득자에 대한 세금납세 요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종합부동산세와 같은 보유세의 경우 소득이 없어도 보유자체로 세금을 부과받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조세저항이 있지만, 사회복지세나 소득세의 경우 소득의 일부를 내는 것이기 때문에 보유세 보다는 상대적으로 조세저항이 덜하다. 또한 복지에만 사용하는 목적세이므로, 어떤 성격의 정부가 집권하더라도 안정적으로 복지정책을 확대할 수 있다. 
핵심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 모두가 복지국가를 위한 비용 부담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시장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사도 비용을 지불하듯이, 복지 혜택을 누리려면 비용을 내는 것이 마땅하다. 더 이상 추가 비용 없이 물건을 주겠다는 상인에게 속지 말고, 증세·탈세 방지·정부지출 개혁을 비롯한 세금과 재정문제에 대해 진지한 대중적 논의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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