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 뚜껑을 열어보니…

섹션:

글쓴이 :

ljh@klsi.org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Old Boy)>가 예상대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개봉 2주만에 전국관객 100만 명을 돌파하더니 몇 주 째 최다관객 1위를 고수하고 있다. 2003년 11월에 밀라노에서 개최됐던 ‘필름마켓’에서는 한국영화 판매 사상 최고 금액인 220만 달러에 판매계약을 체결했단다. 정말 잘 나간다. 그런데, 이 영화의 어떤 점이 그 많은 사람들을 극장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일까? 상영관 입구의 어둠으로부터 토해지는 사람들이 가슴에 품고 나오는 그 물컹물컹한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모두가 맞장구를 치는 이야기는 <올드보이>가 정말 ‘잘 만들어진(well-made)’ 영화라는 점이다. 이 영화로 쏟아지는 다소간의 혹평들도 치밀하게 압축된 이야기의 밀도, 파격적인 극의 전환을 자연스럽게 잇는 섬세한 연출력, 촉감이 느껴질 듯한 배우들의 연기 등 영화 자체의 완성도를 나무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완성도가 흥행을 항상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 영화평론가들의 기대와 예상의 역사는 무참한 패배의 기록들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영향력이 큰 영화주간지가 2003년 한국영화계를 돌아보는 영화제작자들의 대답에서 끄집어내는 공약수가 “관객이 따지기 시작했다, ‘웰메이드’ 적중”이란다. 그러고 보면, <올드보이>의 핵심 흥행요인으로 ‘완성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그다지 틀린 답은 아닐 듯 싶다. 허나, 이는 틀린 것은 아닐지라도 많이 모자란 대답이다. 

“미리 알려고 하지마!”, 뻔뻔한 장담이 노리는 것

영화도 시장의 유통을 거쳐야 하는 상품인지라, 물건만 좋다고 장사가 잘 되는 게 아니다. 배급체계에서 엉덩이를 굳세게 부비적거리며 널찍하게 자리잡아야 하고, 광고 등을 통해 사람들의 상징체계 안에서 독특하면서도 보편적인 장점을 갖춘 것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올드보이>를 부각시키는 광고 전략은 영화 못지 않게 잘 만들어진 것 같다. 특히 ‘영화의 결말을 발설하지 말 것’을 배우와 제작진의 계약사항에 담으면서까지 이야기의 비밀스러움을 유지했던 것이 관객들의 기대를 모으는데 주효했다. 이는 마찬가지로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결말”을 내세운 <매트릭스3> 광고의 실패와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당신은 예측하지 못할 것’이라는 뻔뻔한 장담은 그 영화에 기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예측’에 더욱 몰입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관객들이 영화와 마주쳤을 때 기대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예측’이 배신당하는 순간의 짜릿함과 희열이다. 물론 ‘배신당하는 순간의 희열’이란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맥락 없이 튀어 버리거나 할 말을 못 찾고 지리멸렬함 속으로 스며드는 영화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매트릭스3>는 그동안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형이상학적 물음’들을 대충 내팽개쳐 버렸다. 그리고 이를 현란한 특수효과와 액션의 모호한 점묘화 속으로 구겨 넣고는 주인공 ‘네오’를 낡고 상투적인 결말로 걸어가도록 했다. 그러므로 <매트릭스>시리즈에 기대를 품고 있던 관객들에게는 상투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예상할 수 없는 결말”이었다. 몇 권의 철학책까지 만들어지도록 했던 <매트릭스>시리즈의 열혈관객들이 원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물론 <매트릭스>시리즈를 보기 위해 극장 앞에 길게 줄 선 모든 관객들이 그런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매트릭스>시리즈를 독특한 SF액션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던 이 열혈관객들은 영화의 대중적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예상할 수 없는 결말”이라는 광고의 커뮤니케이션은 이들에게 결국 ‘질 나쁜 농담’으로 인식되었고, 그 광고의 자극으로 인해 더 커진 실망감은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와 언로를 통해 ‘초고속으로’ 전파되었다.   

<올드보이>도 ‘미리 알려고 하지마’라고 장담을 했다. 그리고 ‘니들이 날아 봤자 별 수 있겠냐’는 표정을 짓고 있는, 닳고닳은 관객들의 짓궂은 시선 앞으로 태연하게 인류학적 금기, ‘근친상간’을 꺼내 놨다. 예술작품에서야 자주 다뤄지긴 했지만 ‘금기’란 일반적으로 의식의 수면 위로 여간해서는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잔뜩 궁금증을 키워 놓은 상태에서 영화 종반 불쑥 내던져진 ‘금기’는 관객들에게 우선 불청객이다. 이 불청객은 멍해진 관객들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가운데 떠억 자리잡고 앉아서 종을 딸랑딸랑 울리고서는 ‘너희들의 예측이 완벽하게 배신되었음’을 거만하게 알린다. 

금기의 경계선을 오가는 쾌락

이 영화를 통해 상식적인 세계관의 균열을 경험한 관객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세계일보는 사설을 통해 청소년에게 미칠 영향을 걱정하며 영화를 준열하게 꾸짖었다. 일부 관객들은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 게시판에서 영화를 향해 악담과 욕설을 퍼붓고 있다. 영화라는 환상과 현실의 거리감이 없는 사람들이거나 거리감이 없는 사람들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된 관객층, 파편화된 현대사회의 도시를 살아가는 성인들은 대부분 환상과 현실의 거리를 어느 정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환상 속에서 상식적인 세계관이 붕괴되는 경험을 일종의 쾌락으로 여긴다. 

생존경쟁으로 시달리는 도시인들에게 ‘변함 없이 안온한 삶’은 바라마지 않는 것이면서 동시에 숨막히는 죽음의 냄새를 언뜻 풍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온하고 쾌적한 삶을 찢어발겨 그 속에 숨어있던 ‘금기’와 죽음의 흔적을 드러내는 환상은 불쾌함과 숨통이 열리는 쾌락을 동시에 관객들에게 던진다. 그런데, 이 영화의 등장인물과 공간은 모두 비전형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이를 통해 금기와 맞닥뜨린 관객들은 이 영화가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환상’임을 깨닫게 된다. 대부분 어느 정도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불쾌함을 누르며 영화관의 암흑 속에서 쾌락을 즐긴다. 그리고는 영화의 마지막 클로즈업된 주인공의 얼굴, ‘금기’를 의식의 수면 아래로 밀어 넣은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는 모호하고 섬뜩한 웃음을 짓는 그 모습을 되새김질하며 관객들은 물컹물컹해진 가슴을 안고 영화관을 나서는 것이다.  

중국의 유명한 영화배우 류더화(유덕화)는 <올드보이>를 네 번이나 봤다며, 대단한 영화라고 추켜세웠단다. 아마 흥행이 잘 되는 걸 보면 류더화 같은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영화 <올드보이>는 금기의 경계선을 오가는 쾌락이 무엇인지를 아는, 영리한 영화쟁이들의 ‘잘 만들어진’ 상업영화다.                 
 

 

제작년도:

통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