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자본주의의 출현과 노동자계급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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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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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에 노동자 투쟁에서 차지하는 노동조합의 역할은 커졌습니다.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 변화함에 따라 새로운 착취 형태와 경제·정치적 억압이 강화되었고, 노동자계급은 투쟁 강도를 높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고양되면서, 조직 노동자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노동조합운동이 성과를 얻게 되자 노조원 수는 두드러지게 늘어났죠. 1890∼1900년에 이르는 10년 동안 노조원 수가 독일은 2.5배, 영국은 2배 가량 증가했어요. 

그러나 노조 조직률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었죠. 1904년 각국 조직률을 보면, 벨기에 7%, 오스트리아 8%, 스웨덴 9.9%, 독일 27%, 영국 33%였고, 덴마크는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은 50%였어요. 이런 조직률의 차이는 자본과 국가권력의 억압과 지배, 노동자들의 낮은 계급의식, 비숙련 노동자 가입을 배제한 노조의 폐쇄성, 여성노동자의 수동성 때문입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여성노동자의 노조참여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 20세기 들어서면서 여성노동자의 노조참여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

영국의 신노동조합운동과 의회주의 

1850∼1875년까지 영국 자본주의는 황금시대를 구가했습니다. 이 시기에 노동조합운동도 확대되었죠. 노동조합 전국중앙조직(National Center)인 영국노동조합회의(TUC)가 1868년 결성되었고, 1876년까지 노조원 수는 4배가 늘었어요. 그러나 1873년에 시작된 세계 경제 공황은 영국 자본주의와 노동조합운동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죠. 이 시기 노동조합은 조합원 580,976명을 확보하고 있었고, 노조는 숙련공과 '노동귀족'들이 지배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노동조합은 보수적인 '협조주의' 방침에 따라 초기의 전투적이고 급진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노동조합운동은 협동조합에 치중하여 질병·실업·사망 등의 보상을 위한 공제조합제도를 도입했어요. 이것은 직업별 노동조합이 지닌 공통적인 경향이기도 했죠.

한편, 영국 노동조합운동은 노사분쟁의 해결을 중재재판소나 1896년에 설치된 노사조정위원회에 맡기려 노력했습니다. 노동쟁의를 조정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시민적 평화'의 제도화로 볼 수 있어요. 이러한 노동조합운동의 '제도화'는 노동조합이 사회적인 지위를 얻도록 했고, 그 결과 노조 기구가 '관료화', '부르주아화' 되어 갔습니다. 

1880년에 이르자 세계 산업을 독점했던 영국의 지위는 쇠퇴했으며, 대기업의 발전과 기술진보에 따른 숙련공의 지위 저하는 노동조합운동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항만·가스·철도·해운·광산 등에서 비숙련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노동조합운동'(New Unionism)을 일으킴으로써 낡은 형태의 노동조합이 고수했던 배타성이 무너지게 되었죠. 신노동조합운동이 추구한 것이 자본주의 제도의 변혁은 아니었어요. 대신 자본주의 질서를 인정하면서 특정 직종의 노동력 공급을 제한함으로써 임금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꾀하고자 했지요. 

노동조합운동의 조직과 활동에서 큰 변화가 이뤄지는 가운데, 의회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주의 사상이 부활하여 1906년 노동당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 미국 여성노동자들의 시위 모습 ]

프랑스 노동운동의 성장과 생디칼리즘

1871년 세계 역사상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정권으로 불린 파리 코뮌이 붕괴되면서 노동자계급은 처절한 패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는 독점자본 형성기로 들어섰고, 대기업의 발달로 조직노동자 수가 급증하면서 노동조합운동이 성장했죠. 특히 1884년 노동조합이 합법화되면서 직업별 노동조합 조직이 여러 산업으로 확대되었어요. 

이 시기 노조원 수 통계는 불확실합니다. 1890년 138,692명으로 보고되었고, 1894년에는 403,440명으로 증가했어요. 1912년에는 1,064,000명이 노조에 가입한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노조 조직은 비교적 고도의 조직형태로 발전하여 전국과 지방연합체를 구성하는 과정을 밟았습니다. 산업별 조직화는 먼저 1879년 모자 제조공에서 출발하여 1881년 출판, 1883년 탄광, 1890년 철도 등으로 이어졌죠. 1910년까지 66개의 전국 조직이 직업별 또는 산업별 형태로 출현했습니다. 

프랑스 노조 조직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 되었던 것은 지방 및 지방연합회 형식의 '노동거래소'였어요. 노동거래소는 많은 기능을 지니고 있었고 높은 권위를 발휘했죠. 그것은 실업·재해·기타 사회보험사업을 수행했으며, 도서관·상담소·노동박물관·직업학교 등을 운영하는 한편, 통계 업무를 발전시켜 파업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1887년 노동거래소는 파리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는데, 1892년에는 14개, 1898년에는 74개, 1908년에는 157개에 이르렀어요. 노동거래소는 1892년 상테티엔느에서 전국적인 '노동거래소 연맹'을 결성했어요. 

노동 조직이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노동조합 전체를 포괄하는 조직의 건설을 위한 노력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1895년 리모쥬에서 내셔널 센터로서 프랑스노동총동맹(CGT)이 결성되었죠. 1902년에 열린 몽페리에 대회에서는 노동거래소가 노동총동맹과 통합함으로써 단일 조직이 탄생합니다. 

프랑스 노동조합운동이 조직 통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 사이에 이념 투쟁이 진행됩니다. 그리고 1890년대 이후에는 생디칼리즘이 노동총동맹을 주도했어요. 

생디칼리즘은 사회 조직의 중심으로서 '생디카'와 행동의 상징으로서 '총파업'을 특징으로 합니다. 생디칼리스트는 생디카, 즉 노동조합이 노동자계급의 유일한 조직이고 그것만이 노동자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다고 주장했어요. 또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의 투쟁 조직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제도가 철폐된 이후에도 미래의 생산조직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생디칼리즘은 정당제도와 선거 참가를 부정했죠. 의회 참가도 단호히 거부했어요. 생디칼리스트는 자본주의 제도를 철폐할 수 있는 위대한 무기는 총파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생디칼리스트는 생디카를 이끌고 총파업을 조직하는 데서 '전체를 발효시키는 소량의 효모'인 소수 정예를 매우 중시했어요.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은 1906년 아미앙 대회에서 프랑스노동총동맹의 운동이념으로 채택되었죠. 

생디칼리즘을 두고 프랑스 노동운동 안팎에서 오래 동안 격심한 비판이 일어났지요.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은 생디칼리즘을 '좌경 수정주의'로 규정하면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잃은 소(小)부르주아지의 분노와 초조 그리고 동요를 반영"한 것으로 비판했습니다. 프랑스 노동조합운동 내부에서도 생디칼리스트 지도자들은 프랑스 노동자의 진정한 통일이나 계급투쟁에서 획득할 성공을 보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파업을 위한 충분한 준비활동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파업 지도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비판을 받았죠. 

독일 노동운동의 고양

1850년를 지나면서 독일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급속하게 진행되었어요. 이와 더불어 노동자계급도 그 수가 크게 늘어났죠. 노동자의 노동·생활조건 개선을 위한 요구가 커지면서 노동조합운동이 고양되었어요. 1860년대에는 단결금지령의 해제를 전후하여 독일 각지에서 수많은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죠. 이 시기에 결성된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인쇄·제본·담배·제화·건축 등이 중심을 이뤘고, 주로 경공업 부문 숙련노동자 중심이었습니다. 이들 노동조합은 노동조건의 유지·개선을 목표로 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와 함께 생산협동조합의 촉진과 공제활동을 중시했죠. 또 노동조합운동은 사회주의 정당의 협조와 지도를 받았습니다. 

1871년 프로이센의 융커 출신 비스마르크(Bismarck)가 독일 통일을 이룩했습니다. 융커는 독일 엘베 강 동쪽에 많았던 대토지 귀족을 말합니다. 프로이센 사회의 중심 세력으로 고급 관료와 군대 장교를 독점하였고, 지방행정을 장악했죠. 통일은 프로이센 주도로 '위로 부터' 행해진 근대화 과정을 의미했습니다. 독일 통일은 독일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계기가 되었고, 동시에 독일 노동조합운동의 발전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비스마르크
 
1873년에 시작된 '대불황'은 자유주의 정책을 철회하도록 만들었고, 독일은 제국주의 정책을 펴게 되었어요. 국내외에서 계급대립이 격화하자, 지배세력들이 강압적인 정책을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이죠. 1878년 비스마르크는 황제 빌헬름 1세에 대한 테러 사건을 빌미로 '사회민주주의자의 위험한 활동을 단속하는 법률'을 시행했습니다. 이 법으로 사회주의노동당(사회민주당 전신, 1875년 결성)을 불법화했고, 그 정당과 유대가 깊은 노동조합들을 해산하거나 억압했죠. 짧은 기간에 유리·목공·금속·제화·광산 등 전국노조 17개와 지방 노조조직 18개가 파괴되고 사회민주당이 지도했던 공제조합 330개가 해산되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단속법을 시행함과 동시에 1880년대에 사회보험정책을 시행했어요. 이것은 노동자계급을 사회주의혁명을 지향하는 정당의 영향에서 분리하여 체제 안으로 포섭하려는 의도에서 이뤄졌죠. 

비스마르크의 억압정책 아래서도 노동조합운동은 중앙집권화되고, 통제되고, 정치적으로 되고, 그리고 사회민주당의 정치적 지도를 이전 보다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노동조합운동과 당의 지도로 강력한 파업투쟁이 전개되었죠. 한편, 사회민주당이 획득한 투표수도 해마다 증가했는데, 1878년 49만3천 표에서 1890년 142만7천 표로 거의 3배 증가했어요. 사회주의자단속법은사회주의 세력을 격멸할 수 없었던 거죠. 이 법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 선거활동을 허용하였기 때문에 사회민주당을 의회선거를 위한 당으로 만든 제일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자단속법이 철폐된 뒤, 독일 노동조합운동이 펼친 중요한 발전은 노동조합운동 최초의 상설 중앙지도부로서 '독일 노동조합 총무위원회'를 창설했다는 점입니다. 1892년 3월 할베르슈타트에서 노동조합원 30만3천명, 노동조합 62개를 대표하는 208명의 대의원이 참가하여 총회를 열고 레기엔(Carl Legien)을 의장으로 하는 7명의 총무위원회를 선출했습니다. 

한편, 사회민주당은 1891년 당 대회에서 에르푸르트 강령을 채택했어요. 라살레주의를 청산하고 마르크스주의를 당의 기본노선으로 채택한 것이죠. 사회주의를 향한 강령과 자본주의에서 실현되어야 할 당면 강령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갖고 있었습니다. 에르푸르트 강령은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했던 노동조합의 정치적 지침이 되었죠. 

1890년대 이후 독일 노동조합운동은 '대불황'과 자본측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쳐 침체를 겪게 됩니다. 20세기 들어 독일 노동조합운동은 고양기를 맞게 되었고, 세계노동운동의 발전에서 선도적 역할을 맡았어요. 1892년 조직 노동자 수가 32만9,230명이었던 것이 1900년에 68만427명, 1905년에 134만4,803명으로 증가한 것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노동기사단과 미국노동총동맹

1870년대 들어 미국 자본주의는 독점단계로 진입했습니다. 미국 노동자계급은 1875년 펜실바니아 탄광노동자 파업을 위시하여 1877년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도 파업, 1886년 5월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한 총파업을 감행했어요. 1870년 이후 30년 동안에 걸쳐 미국 노동자계급은 수많은 파업과 선거투쟁을 벌였죠. 동시에 두 개의 대규모 전국 조직, 노동기사단(Noble Order of the Knights of labor)과 미국노동총동맹(AFL)을 발전시켰습니다. 

노동기사단은 '전국노동연맹'(National Labor Union)이 전국조직 구실을 했던 시기인 1869년 필라델피아에서 조직되었습니다. 하지만, 1877년에 일어난 철도 대파업과 더불어 노동조합운동이 고양될 때까지는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죠. 1880년대 초 대규모 파업과 보이콧 투쟁을 계기로 노동기사단은 조직세를 크게 증대할 수 있었습니다. 1886년에는 노동조합원 수가 60만 명에 이르렀어요. 그러나 1890년대 말에는 와해상태에 빠지게 되었죠.

미국노동총동맹(AFL)은 1881년 11월 피츠버그에서 6개 직업별 노조의 주도로 결성되었는데, 도장공 노조, 목공 노조, 주형공 노조, 유리공 노조, 담배제조공 노조, 철강 노조 등이 참가했죠. 6개 노조의 노조원 수는 5만 명 가량이었습니다. 미국노동총동맹 결성 초기에는 노동기사단의 강력한 활동에 밀려 조직 확대가 잘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886년 대파업을 계기로 노동총동맹은 노동조합운동을 주도하는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죠. 1900년까지 노동총동맹은 노조원 54만 8,321명을 포용했습니다. 



노동총동맹은 결성 초기부터 어느 정도의 전투성과 계급정신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규약 전문은 분명히 계급투쟁을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1890년 무렵까지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이해관계 조화를 내세웠고, 숙련공 중심의 조직임을 표방했죠. 노동총동맹은 미숙련공, 흑인 노동자, 여성노동자를 조직 대상에서 배제했고, 사회주의 운동과 대결했어요. 그리하여 노동총동맹은 노동자계급을 자본주의 제도에 결박시켜 숙련공의 이익과 맞바꿈으로써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파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노동총동맹의 이런 운동노선에 반대하고 산업별 노조를 추구하는 노동조합운동이 나타났는데, 1905년에 결성된 세계산업별노동조합(IWW)이 그것입니다. 

파업 투쟁의 확대

노동자계급의 기본 권리와 경제·정치적 이익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한 투쟁은 자본주의가 독점단계에 들면서 강화되었습니다. 특히 착취에 반대하는 파업과 다른 형태의 투쟁은 독점체의 공세를 막는 데 집중되었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파업투쟁이 격화되었습니다. 파업건수가 가장 많았던 해는 1899년이었어요. 파업 건수와 참가인원에서 가장 많았던 나라는 미국이었고, 유럽 대륙에서는 독일, 프랑스, 영국이었습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일어난 파업의 특징은 비교적 높은 성과를 획득했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독일의 경우 파업 성공률은 1900년 19%에서 1904년 25%로 높아졌어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경우도 파업 성공률의 증대는 그다지 안정적인 편은 아니었으나 두드러진 양상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의 파업투쟁이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눈에 띄게 정치적 요구가 높았다는 사실입니다. 노동조합운동이 다양한 형태의 공격을 받던 상황에서 노동자의 단결권 보장 문제가 자주 투쟁 대상으로 떠올랐어요. 

이런 파업투쟁들 가운데 총파업으로 확대되었던 경우도 보기 드문 현상은 아니었죠. 20세기 처음 4년 동안에 러시아, 스페인, 이탈리아, 스웨덴, 프랑스, 벨기에서 총파업이 일어났으며, 요구의 성격과 규모는 달랐지만 대부분 정치적 성격을 띠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적·전술적 발전은 총파업 방향으로 진전되었어요. 최초에는 노동자들이 개별 사업장에서 파업을 벌이다가, 다음 단계로 같은 지역의 몇몇 공장에서 연대파업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전술을 확대했습니다. 마침내 산업과 국내시장의 확대에 따라 노동자는 직업별 또는 산업별 총파업을 결행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노동자 투쟁이 전국 총파업 차원으로까지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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