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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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도 밥그릇을 빼앗기면 화를 낸다는 말이 있다. 하물며 삶의 울타리를 갑자기 잃어버린 사람은 절망을 넘어 분노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지금은 세상 속에 묻혀져 가는 대우차 정리해고 사태. 그러나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복판에 대부분의 피해 당사자들은 아직도 새로운 인생의 감각을 찾지 못하고 고통의 굴레에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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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그룹은 1998년 8월 워크아웃을 선언하기 전까지 만해도 정말 잘 나가는 회사였다. 우주심벌마크가 그려진 회사로고는 시간이 문제였지 세계를 금방이라도 삼켜먹을 듯한 저돌적이고도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그룹이었다. 하지만 뒤에 숨겨진 경영의 부실 덩어리는 끝내 좌초하고 말았다. 듣기도 많이 들었던 분식회계라는 것이 진원지였다. 이십 여개가 넘는 계열사를 포기하고 자동차전문그룹으로 키우겠다는 김우중 경영주의 발표는 공염불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사상초유의 대우차 정리해고가 발표되면서 파장의 물결은 아직도 일렁이고 있다. 


[ 1월 15일 인천지방경찰청에서 항의집회를 하고 있는 대우자동차 노동자들   ▷ 대우자동차노동조합 ]

정리해고 반대투쟁

내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알람은 지금도 새벽 5시45분이 되면 일어나라고 울려댄다.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면서"라고 삐리릭 삐리릭 소리낸다. 직장에 다녔을 때 고정해놓은 기상소리가 해고당한 이후에도 변함은 없다. 삭제하고 싶은 맘도 없고, 복직하면 그 시간에 맞추어 출근하고 싶은 간절한 바램뿐이다. 

그러고 보니 정리해고 받은 지 벌써 일년이 다 되간다.  
노조와 회사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되면서 경영주는 우편등기로 해고통보를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등을 돌렸다. 속내는 다들 아니기를 바랬지만 정확히 해고통보는 집배원을 통해 명단에 속한 사원아파트 초인종들을 눌렀다. 그 날 참으로 아내들은 많이도 울고 울었다. 해고가 떨어진 남편이름을 확인하고 넋 나간 사람들처럼 있었다. 워낙에 대우차 정리해고가 언론집중을 받아서인지 시골에 계시는 연로한 부모님들께서 동지들에게 내 자식이 해고에 포함되었는지 걱정 어린 전화를 많이 했다. 그러나 거의 다라고 할 만큼 자신은 아니라며 애써 감추었다. 차마 부모님 눈가에 수심 드리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해고통보를 받은 조합원들은 노조지침에 따라 회사로 속속 집결하였다. 대부분이 해고자였지만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동지들도 있었다. 젖먹이 아이를 등에 업고 나온 아내부터 낮부터 술 꽤나 먹고 얼큰하게 된 동지들 모두 비참해 보였다.

행동지침에 따라 노조 중심으로 단결하여 엄청난 해고사태를 이겨 내자며 간부들은 부르짖었다. 하지만 모든 동지들은 일체의 구심점을 만들기보다 어찌할 바를 모르며 우왕좌왕했다. 1700명의 해고자 중 실질적으로 회사에 집결한 숫자는 가족까지 포함해서 600명 정도였다. 해고 명단이 통보되면서 자포자기한 동지들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경찰이 회사 입구 마다 강제로 출입을 봉쇄하면서부터 모이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경찰하고 대치하기를 여러 날, 회사와 정부는 강경한 어조로 정리해고 살상을 밀고 나갔다. 2월19일 전국 사업장에서 연대하러온 동지들과 해고자가 합류하지 못하도록 경찰은 사력을 다해 막았다.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 저녁식사를 하는 틈새를 이용해 경찰은 정문과 남문의 담벼락을 포크레인으로 허물고, 농성중인 해고자들을 강제 진압했다. 해고자들은 몸부림치는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수 분내에 진압되었다. 경찰에 연행된 해고자들은 범법자가 된 것처럼 인천 각 경찰서 유치장에서 수갑을 찬 채 하루걸러 이틀씩이나 조사를 받고 풀려 나왔다. 

경찰의 폭력진압

회사에서의 농성이 강제진압으로 중단되면서 노조는 산곡동 성당으로 거점을 마련했다. 많은 간부들이 인천구치소로 이감됐지만 이때부터 실질적으로 해고자들의 체계가 틀이 잡혀갔다. 억울함과 구조조정이라는 단어로 노동자들의 피해만 양산되는 정리해고의 본질에 수긍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회사 경영이 실패한 이유는 사업의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 책임을 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해법을 찾아야 하는데 노동자만 자르는 것이 능사라고 여긴데 있었다.

노조는 산곡동 성당에서 조직을 재정비를 하고 싸움의 반격을 준비했다. 부평일대는 계엄령이 선포된 양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서서히 해고의 피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본인도 그렇지만 대부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며 불면증을 호소했다. 수년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는 동지는 기본이고 차분했던 성격인 동지가 이유 없이 화를 자주 내곤 했다. 해고로 가정불화가 생기면서 이혼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에 못 박혀 있던 선배 동지들의 충격은 더욱 컸다. 평균 근속연수가 13년은 기본이고 나이가 38.5세였다. 부양하는 식구들 얼굴만 떠올려도 미치고 답답하다고 한다. 

정리해고 사태 50일쯤 공장은 해고자를 수천 명 아니 퇴직자 포함하여 칠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몰아내고도 가동되고 있었다. 함께 근무했던 동지들이 퇴근시간에 나오면 무척이나 반갑기도 했지만 회사의 분열책동으로 서먹서먹하기도 했다. 모두들 산곡동 성당보다 공장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라 생각했다. 노조는 노조출입 가처분신청을 냈고, 법원이 해고자조합원도 출입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림에 따라 노조는 공장진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경찰은 안된다며 법원결정을 무시했다. 해고자들은 항의표시로 윗옷을 벗고 땅바닥에 누웠다. 순간 "쳐!" 하면서 경찰의 피비린내 나는 진압 작전이 시작되었다.

아수라장이 되면서 백 여명에 가까운 부상자가 나왔다. 갈비뼈가 부러져 폐에 찔리고 좌, 우측 사지 살점이 찢어지면서 수십 바늘을 꿰매는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영상패에 잡힌 비디오가 방송에 나가면서 대우차 해고자의 실상과 정리해고의 부당성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살길을 찾아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해고자들은 실업급여에 의존하면서 제대로 정산되지 않은 퇴직금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당장 그나마 부족한 생활비는 노동판에서 받은 품삯으로 보충했다. 그 속에서 갈등이 생겨 나오기 시작했다. 누구는 투쟁을 계속하는데 누구는 노조일정에 집중하지 않고 간간이 나온다며 비난을 듣기도 했다. 물론 이해하자는 이도 적지 않았지만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고 서로의 마음을 괴롭혔다.

회사에서는 퇴직자와 정리해고자를 대상으로 희망센타를 운영했다. 나름대로 취지는 취업알선과 창업을 위한 도우미 역할을 하고자 함이었다. '눈 높이를 낮추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나기를 권했지만 사실상 새 직장을 찾아 둥지를 튼 이는 많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면접을 보러 가면 대우차 해고출신이라는 게 죄 아닌 큰 죄로 평가되면서 거부감을 준다는 것이다. 이상한 편견이 사회에 만연해 있었고, 통곡할 노릇의 정리해고자라는 자괴감은 스스로를 너무나 슬프게 했다. 그래서인지 자의반 타의반으로 퇴직한 동지들과 해고자 일부는 치킨점이나 식당으로 전업을 많이 했다. 위로금 한푼도 받지 못한 현실에 퇴직금이나 가계대출로 주로 빚을 내서 소규모 창업을 하는 쪽이 많았다. 더러 친인척 소개로 당장의 끼니 해결을 위해 배달을 하거나 영세한 사업장에 들어가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생활해결은 판매영업이라든지 차량과 관련된 업종 및 분식가게나 택시영업이 주로 많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갑자기 몰아친 정리해고 사태 이후 급조된 희망센타는 거품많은 영양가 없는 기구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성과라면 기술연구직 전문 분야 출신들은 다른 곳으로 이직한 것을 들 수 있다. 조심스럽게 충고하자면 워크아웃 당시부터 전업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도우미 역할을 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달력은 이미 가을로 들어서면서 고용보험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모든 동지들이 그렇지만 가정을 가진 해고조합원들은 생활력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가족들 중에 몸이 아픈 사람이 생기면 마음은 더욱 슬퍼졌다. 새벽 이른 아침부터 날품팔이를 위해 인력시장을 다니고 빚을 내어서 가판장사를 하는 동지들부터 참으로 해고이후 삶은 많이 바뀌었다. 많은 걱정거리가 있겠지만 먹고 사는 것이 제일 문제였다. 투쟁의 동력도 본의 아니게 의식주 해결에 초점이 되면서 가계부가 흔들리는 동지들은 꾸준히 집회에 참석 못하고 징검다리 형태로 모이곤 했다. 그렇다고 복직의 염원을 접어둔 것은 아니었다. 많은 집회로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어느새 계절은 초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 1월3일 산곡성당에서 2002년 투쟁선포식을 개최한 대우자동차 해고자들  ▷ 대우자동차노동조합 ]

묵묵부답의 분위기

노조는 일방적 매각 반대에서 사실상 조건부 매각으로 물꼬를 틀었다. 정부는 계속해서 GM으로 GM으로 매각 협상을 추진하고 있었다. 한편 본 계약체결을 위해 정리해고 사태 이후 8개월 여만에 노사협상자리가 열렸다. 해고자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매각반대와 조건부매각으로 조심스럽게 의견이 나뉘어져 가면서 빼앗길 대로 빼앗긴 가슴속의 한(?)을 풀고자 힘을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협상의 요지는 이미 틀 속에 정해져 있었다. 군산, 창원공장만 인수하고 부평공장은 제외했다. 사실상 협상의 주된 목적은 유리한 조건으로 매각하기 위해 단협을 개정하고자 정부와 회사측이 자리를 만든 게 정확하다.

크게 달라진 것 없이 물 흐르듯 새해 벽두를 맞이했다. 공장에 남아 있던 동지들 가운데 사직서를 쓰고 떠나는 이도 적지 않았다. 내가 근무했던 조립 2부에서만 250여명이 해고당했고, 지금도 자의반 타의반 사표를 내고 있음을 볼 때 공장에서 많은 동지가 떠나고 있다. 생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매각인수대상에서 부평공장이 제외되었다는 점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요인이 크게 작용한 듯 싶다. 그렇다고 노조가 주도하는 공청회에 적극 참석하며 얽힌 실타래를 풀자고 하는 마음도 없는 것 같다. 이도 싫고 저도 싫은 묵묵부답이 전반적인 분위기다. 되짚어보니까 대규모 정리해고 단행이후 많은 동지들이 강제적으로 일자리를 잃었다. 정면돌파를 불사하면서 정리해고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노조입장도 있었지만 현실적인 협상을 통한 사태 해결을 바랬던 동지들도 있었다. 끝내는 터져 버린 해고사태에 모두들 분노와 충격을 느꼈지만 노조를 향한 질타도 흘러 나왔다.

해고사태를 피할 방법이 없었나 노조가 고민하는 가운데 회사와 정부는 여론몰이를 하면서 밀어 부쳤다. 한편으로는 그래서 적지 않은 동지들이 속으로 끙끙 앓았던 모습들을 보였다. 해고된 후 갈 길을 찾아 떠난 동지들도 있다.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들도 많지만 정녕 중요한 것은 노조가 결정적인 판단을 할 때 조합원들의 의견을 충분히 정책에 수렴하지 않고 진행했다는 데 아쉬움을 보이고 있다. 현재는 '정리해고 특별대책위(정특위)'에서 투쟁의 줄기와 가닥을 잡고 있다. 

절망을 넘어 복직으로

오늘도 이른 새벽에 찬 공기를 가르며 판매 광고지를 들고 상가를 돌았다. 모두가 잠든 시간이다. 결혼 5년 차로 접어든 가정생활은 한달 꾸려나가기에는 백여 만원이 족히 든다. 티없이 자라는 네 살 된 어린 딸을 보면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내에게는 걱정 말라며 위로하지만 집을 나서면 아무래도 생활비 생각에 오늘 혹시나 아무 것도 팔지 못하면 어쩌나 머리 속이 지끈지끈 아프다. 꾸준하게 집회에 참석도 못하니까 동지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이해해 주는 동지들도 많지만 내 맘은 편치 못하다. 지금 세간의 관심은 멀어져 있지만 아직도 대우차 해고동지들은 해를 넘기면서 공장으로 꼭 돌아가야겠다는 의지를 갖고 싸우고 있다. 부당한 정리해고 철회를 위해 오늘도 긴 호흡을 몰아쉬며 하루 하루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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