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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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륭투쟁 연대로 태어난 <함께 맞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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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현장]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기륭투쟁 연대로 태어난 <함께 맞는 비>

 
견명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교육차장)
  saramsari@klsi.org
 

<영화와 책>이라는 동호회가 있다. 동호회 이름 그대로 영화보고 책보고 수다 떨고 뭐 그러는 모임일 거다. 그 동호회 회원 한 사람이 처음으로 책을 출판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작가와 회원들이 티격태격 했단다. “돈주고 사겠다”, “회원들한테 어떻게 돈을 받냐?”, 그러다 결국 “싸게 팔고 수익금을 기부하자”는 중재안이 등장했단다. “어디에 줄까?”란 물음에 나온 누군가의 제안, “기륭전자!” 그들은 그렇게 기륭을 처음 만난다. 

사람이란 그렇다. 죽고 사는 문제도 제 일 아니면 관심 없는 것, 김소연 기륭전자분회장이 단식을 며칠째 하고 있든지 간에 그게 내 문제가 아니면 그저 ‘기사 한 줄’에 불과한 것. 하지만 촛불 하나를 들고 거리를 누비던 뜨거웠던 여름,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그들은 기륭을 만났고, 기륭의 여성 노동자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김소연 분회장의 뼈만 남은 육체를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들은 가리봉 뒷골목의 좁은 천막 안에서 김소연 분회장의 가녀린 몸을 통해 ‘육체의 언어’와 마주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또 다시 찾아간 농성장. 김소연 분회장의 단식은 이미 50일을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저녁 문화제에 참석한 인원은 여전히 20여명……. 울컥! 그들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그래서 시작되었다. “기륭 동조 릴레이 단식!” 


[ 단식단 몸자보와 기륭 손목띠를 두르고 1만인 걷기대회에 참가한 <기륭 네티즌 연대> 회원들 ]

책 팔아 후원해보자던 게 어느덧 연대모임으로 

처음엔 서너 명이 책 팔아 후원이라도 해보자고 시작한 일이다. 그 몇 명이 동조 릴레이 단식 제안을 하면서 8월8일 18명이 처음으로 단식을 시작했다. 단식 11일차에는 110명이 단식을 했다. 그러다 단식 중이던 기륭노조의 김소연 분회장과 유흥희 조합원이 병원으로 실려갔다. 릴레이 동조 단식단은 “우리가 그녀들의 빈자리를 채웁시다!”라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동조 단식단이 처음 단식을 시작한 지 열흘 만에 포털 사이트 다음의 토론 게시판 ‘아고라’를 이용하는 누리꾼들인 아고리언, 국내 최대의 요리 동호회 사이트 ‘82쿡닷컴’ 회원 등 네티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8월18일 아고라TV가 기륭 투쟁 현장에 함께 하면서는 100시간의 생중계를 시작했다. 그렇게 또 열흘이 지난 단식 21일차엔 단식단이 236명이 되었다. 그 사람들이 <만인선언 만인행동>(만인행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바로 “촛불과 비정규직! 싸우는 사람들이 만납시다” 프로젝트다. 만인행동의 1차행동은 9월9일 서울역에서 있었다. 대구, 전북 등지에서 릴레이 동조 단식이 이어졌고 만인행동 2차행동이 조직됐으며, 릴레이 단식 62일차에는 총 663명이 단식에 참여했다. 

그 사이 여기저기 인터넷 사이트에는 「기륭투쟁을 지지하는 당신을 위한 안내서 A부터 Z까지」라는 안내문을 돌아다녔고, 『참세상』이나 『프레시안』같은 인터넷 언론에서는 이러한 네티즌들의 투쟁 후기를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그저 영화 좋아하고 책읽기 좋아하는 몇 명의 네티즌은 <기륭 동조 릴레이 단식단>이 되었다가 <기륭 네티즌 연대>가 되었고, 결국 <함께 맞는 비>로 거듭나면서 570여 명의 회원이 가입한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연대모임이 되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만큼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됐을까? 촛불 하나 달랑 들고 거리를 누비던 동호회 회원 서너 명이서 그냥 ‘울컥’ 한 번으로 시작한 일이. 
그들은 처음부터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동조 단식도 농성장에 와서 할 수 있는 사람은 농성장에서, 자기 직장이나 현장에서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직장 단식으로 진행했고, 또 단식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단식단과 놀아주기’를 제안하여 매일 저녁 기륭 농성장 앞에서 진행되는 문화제에 참여도 하고, 천막을 지키는 단식단이나 기륭 조합원들에게 힘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싸우는 자에게 힘을!” 이라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단식을 할 수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기륭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이면 무조건 손목띠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손목띠를 한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모든 것을 함께 논의하고 모든 것을 함께 결정하기로 했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기륭전자의 최대 거래처 중 하나인 시리우스 사에 항의 메일 보내기를 시작했다. 손목띠를 한 누군가는 원문 편지를 쓰고 또 누군가는 그 편지를 번역하고, 또 누군가는 메일 보내는 방법 등의 정보까지 친절하게 담긴 글을 쓰고 누군가는 그 글을 여기저기 인터넷 사이트에 퍼 나른다. 손쉽게 누구나 시리우스 사에 항의 메일을 보낼 수 있도록 서로서로 도운 것이다. 시리우스 사에서 보내온 답장들이 공개되기 시작했고, 좀 더 강도 높게 시리우스 사에 전화하기가 제안됐다. 

그러는 와중에 단식 중이던 김소연 분회장과 유흥희 조합원이 병원으로 실려 갔고, 이들은 긴급하게 “그녀들의 빈자리를 우리가 채웁시다!”라는 캠페인을 시작한다. 배지를 제작해서 엽서와 함께 팔고, 주간 피케팅을 하고, 바자회를 하고, ‘안티강남 페스티발’에서 피켓 시위를 하고, 단식단 몸자보와 기륭 손목띠를 두른 채로 1만인 걷기대회에 참가하고……. 결국 네티즌들의 항의 메일로 시작된 시리우스에 대한 투쟁은 기륭공대위의 미국 시리우스 사 원정 투쟁으로 이어졌다. 

당시를 회고하는 한 회원은 “그때는 모두들 신들렸었다”고 표현한다. 그렇지만 그런 신들림이 꾸준하게 가능했었던 것은 무엇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 할 수 있는 만큼의 투쟁 방식들을 서로서로 제안해서 실천했고, 그래서 서로를 고양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 <기륭 네티즌 연대>의 안티강남 페스티벌 피켓 시위 모습 ] 

“분회가 하면 우리도 한다!” 

이들에게 갈등과 고비는 없었을까? 이렇게 짧은 시기에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그대로 가지고 모였는데 이견이나 갈등이 없었을 수는 없었을 터다. 

첫 번째 고민은 사람들 간의 정서 차이로 생겨났다. 기륭 농성장에서 매일 저녁 진행되는 문화제 중 금요일은 <기륭 네티즌 연대>에서 기획하고 준비했는데, 이 문화제가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였다. ‘운동권 대 시민’의 논쟁도 있었다. 그 와중에 ‘운동권도 시민도 아닌 경계’에 선 사람들의 답답함에 관한 토로도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생각하게 된다. “1,000일이 넘는 싸움, 내가 이 싸움에 끼어든 것은 며칠이나 될까? 그 며칠이 나에겐 대단한 무엇일지 몰라도 어떤 사람들에겐 수많은 날들 중의 하나일 텐데. 나에겐 연대요, 투쟁일지 몰라도 어떤 사람들에겐 어쩌면 일상일 텐데…….” “바로 그들에게 나는 수없이 스쳐 지나간 사람들 중의 하나. 동시에 나는 천일이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을 버티게 해준 수천, 수만, 수십만의 동지들 중 하나.” 이런 생각들과 더불어 고민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됐다.

두 번째 고민은 시리우스 사에 대한 투쟁이 시작될 무렵 생겨났다. 그저 ‘굶어 죽어가고 있는 김소연’이 불쌍해서 모였던 사람들도 있었고, 그저 ‘비정규직이 이토록 홀대받는 것’에 분노해서 모였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시리우스 사에 대한 투쟁은 무언가 ‘선’을 넘기 시작하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이 싸움은 명확히 ‘자본’에 대한 투쟁”이라는 선을 넘을지를 결정해야 될 때가 된 것이다. 

때마침 『조선일보』가 기륭투쟁에 대해 작정하고 흠집내기를 시작했고, 이러한 언론플레이에 자극받은 기륭전자 소액주주들이 기륭 투쟁을 반대하는 온라인 홍보활동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제 이 싸움의 전개 양상을 볼 때 어쩌면 더 이상 다른 촛불들과 함께 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촛불들에게 오해를 받게 되거나 다른 촛불들을 설득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논쟁과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아주 단순하게 이 문제를 정리했다. “기왕 시작한 연대인데,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까짓, 분회가 하면 우리도 한다!” 

누군가 지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영원히 이길 수 없다 

세 번째 고민은 아무리 싸워봐야 이길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는 데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망이 안보이고 기륭분회의 교섭은 매번 결렬되는데, 밖에 있는 사람들은 참 쉽게도 말했다.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왜 하느냐고. 이런 과격한 투쟁의 방식은 오히려 자기 몸만 상하게 할 뿐이라고. 하지만 이 싸움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지는 것이 좋은 사람들도 아니다. 이 싸움을 몸으로 함께 했던 사람들은 단지 자기 ‘몸’이 시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해 <함께 맞는 비>의 한 회원은 이렇게 쓰고 있다.  

밥을 굶어도, 철탑으로 올라가도, 기륭이 물건을 납품하는 미국의 시리우스 사 앞에서 삼보일배를 해도,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람 하나쯤 죽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이들을 ‘적’으로 둔 이상, 이기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무조건 패배할 거라고 예측하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싸움에 동참해야 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언제까지 싸울 것인지, 얼마만큼 얻어내려고 목표해야 하는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어느 정도인지를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질 확률이 높은 싸움은 그런 식으로 ‘전략’을 짜서 참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언제까지 싸울 것인지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는 분회원이 결정할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는지는 해보기 전에는 모른다. 아마 우리는 패배하고 패배하고 또 패배할 것이다. 그래서 다시금 우리는 왜 지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일까, 라고 묻게 된다. 정답은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싸움은 패배할지라도 다른 싸움을 위한 발판이 된다. 누군가가 지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영원히 이길 수 없다.


‘매트릭스’에 눈뜨고 현실을 마주하다

농성장에서 함께 단식을 하면서 21일쯤 지났을 때, 그들은 알게 되었단다. 김소연 분회장에 대한 감정으로 시작한 이 싸움이 그저 동정심으로 끝낼 일이 아님을, 그녀의 싸움이 그저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기륭의 싸움이 기륭만의 일이 아님을 말이다. 이 나라의 비정규직이 벌써 870만 명이라는 것, 비정규직과 파견 노동을 기업주들이 극단적인 임금 절감과 노조 탄압을 위해서 악용하고 있다는 것, 기륭만이 아니라 이랜드, KTX, 코스콤 등 기륭과 같은 문제로 싸우고 있는 곳이 수백이나 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길에서 종종 보았던 전봇대의 전선을 보수하는 분들이 모두 비정규직이고, 그분들이 수천 명이고, 매년 수십 명씩 죽어가지만 아무런 대책도 수립되지 않고 있다는 것, 우리가 몰랐을 뿐 근 10년 동안 비정규직 싸움이 계속해서 있어왔다는 것, 그리고 그때마다 정권과 기업의 폭력에 산산조각이 났었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 사회의 언론은 소식 한번 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김소연 분회장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우리는 ‘김소연’이 불쌍해서 이 싸움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 단식을 그만두고, 옥상 위가 아니라 우리 옆으로 내려오라”고. 그리고 “이제 우리는 기륭을 위해서라도 기륭을 넘어서는 연대를 하겠다”고. 이렇게 해서 <기륭 네티즌 연대>는 10월9일 공식적으로 해단식을 하고 스스로 해산했다. 그리고 <함께 맞는 비>라는 새로운 연대 모임이 태어났다. 이제 기륭 투쟁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이랜드, KTX, 강남 CMC 등 비정규직 투쟁 현장이면 대체로 <함께 맞는 비> 회원들을 볼 수 있다.  

작은 우산은 잠시 내려두고, 함께 비 맞아 볼까요?

10월13일 기륭전자 사측과 노조의 교섭 결렬과 더불어 시작된 농성장 침탈로 기륭 농성장이 전쟁터가 되었을 때, 그 전쟁을 수행한 주동력도 이들이었고 매일매일 전장에서 조합원들을 지킨 것도 이들이었다. 그 결과 회원 한 사람은 구속되고 또 한 명의 회원은 실명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파란 철문이 있던 기륭 공장은 다른 주인이 차지했고, 기륭 조합원들은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기륭전자 신사옥 앞에서 출근 선전전과 문화제를 이어가고 있다. 기륭 투쟁은 또다시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함께 맞는 비>도 몇몇 헌신적인 핵심 회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활인들이 부담 없이 결합해서 함께 하기 위해 조직을 정비하고 여덟 명의 운영진을 구성해서 역할을 분담했다. 그리고 이들은 시청, 광화문, 기륭 신사옥 등 자기가 가능한 시간에 할 수 있는 곳에서 ‘하루 1시간 기륭투쟁을 알리는 1인시위 하기’ 등의 또 다른 연대를 이어가면서 생활 속의 투쟁을 모색하고 있다.  

내안에 나약함이 휘돌아 감고 나도 몰래 어느 사이 몸을 숨길 때
또 누가 빛을 향해 걸어갔었고 빗속에 멈추지 않았지

소나기 후려치듯 쏟아져 내리고  빗속에 발을 적셔 다가오는 이
멀리서 손짓하며 바짝서는 이 기쁘게 몸 적시는 이

이 작은 우산 접어두고 맘까지 살포시 젖어들어봐
촉촉히 맺혀서 흐르는 눈물 가까이 와서

이 작은 사랑 한 움큼씩 한 움큼 한 번 더 힘을 모아서
슬픔도 함께 함께 맞는 비 함께 맞는 비 

-김성만 글·곡, <함께 맞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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