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위의 노동시장 구조개선특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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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노동시장구조개선특별위원회 논의가 파행 끝에 지난 4월8일 결국 중단되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합의’ 가능성에 대해 여러 이유를 들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였던 바이다. 협상테이블의 당사자들은 각각 ‘면죄부’를 사지 못한 정부, ‘어부지리’를 놓친 재계, ‘들러리’를 거부한 한국노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판’을 깔았던 노사정위의 수장은 공언대로 사표를 제출했고, 공익위원들은 ‘본업’으로 돌아갔다.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사회적 대화는 폐장했다. 가까운 시일 내 다시 개장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 일련의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사회적 대화, 그 이름에 걸맞았나
사회적 대화는 그 원칙과 목표에 대해 이견이 없을 때 가능하다. 각론과 주안점이 서로 다른 것은 차후의 문제일 수 있다. 그래야 서로 말을 섞기 위해 일단 마주앉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너무 달랐다. 적어도 상대를 욕보이지 않는 한에서 대화가 가능할 터인데, 너무 노골적으로 자기 욕심만 챙기려 들었다. 그것도 가진 것도 많고 힘도 센 쪽에서. 게다가 사회자가 그 쪽을 두둔했다. 그런 판은 깨지기 십상이다. 깨지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노사정 간 사회적 대화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이 지배적이었던 것은 비록 형식적으로는 대화의 당사자일지라도 실질적으로 대화의 주선자여야 하는 정부가 그 역할을 방기해왔다는 물증이 너무 분명하다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사회적 대화의 결과, 합의된 사안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을 대신하여 한편으로는 입법부를 경유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행정행위를 통하여 제도와 정책으로 전환시키고, 기타 사안에 대해서는 일단 중장기 정책과제로 남기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부가 담당하고 수행해야 할 주된 역할과 기능이다. 정부가 직접 대화의 당사자가 되는 공공부문에서라면 그것은 시민사회 안에서 공공부문의 사회적 위상이 적절하게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의 집단적 기억 속에는 그러한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 온 정부가 별로 없다. 대신 노골적인 억압기제로서 자신을 드러냈던 국가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서로 상충하는 집단적 이해관계 갈등을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시작부터 '운동장'은 기울어 있었다
대화 당사자들이 공통의 필요를 협상을 통해 달성하고자 한다면 각자가 가진 것과 갖춘 힘을 서로 나누고자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만약 이해당사자들이 가진 것과 갖춘 힘이 불균등하다면 진솔한 대화는―불가능하진 않더라도―매우 어렵다.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약한 당사자는 ‘대화의 장’에 일방적으로 끌려가거나, 그런 ‘대화’를 거부하거나, 다른 조력자를 찾거나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테이블에 앉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때에는 상대방이 ‘파트너’를 아쉬워하는지 여부에 따라 다양한 협상 전략 구사가 가능하다. 최선의 경우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는 대신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반면, 극단적인 경우 지연 전술과 여론전으로 상황을 돌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도 정부 쪽 파트너는 되면 좋고 아니 되어도 그만이라는 태도를 취하였는데, 그것은 이미 플랜A―플랜B가 아니라―를 가동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윗선’의 ‘당부’와 스스로 뱉은 말이 운신의 폭을 아주 조금 좁히기는 했다. 한편 얻을 것은 있을 것이되 잃을 것은 거의 없는 사용자 쪽 파트너는 어쩌면 이 상황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반면 어찌되었든 테이블에 앉은 한국노총은 그것이 무엇이든 도장을 찍었다면 최선의 경우 차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한국노총의 협상대표들은 ‘조직 내 민주주의’의 틀을 깨지 않았던 셈이다. 판 깨고 나올 절호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을 수도 있다. 다만, 무기력했다. 수세적이었다. 양대노총의 위원장들이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모르지만, 민주노총은 밖에서 한국노총을 지원사격한 셈이다. 물론 민주노총에 다른 선택지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따져볼 여지가 있다. 
 
이해당사자들 각각이 개인이 아니라 집단인 경우, 그래서 대화의 장에 직접 들어가는 대표들에 의해 협상이 이루어지는 경우, 합의 도출은 자칫 ‘직권조인’의 주홍글씨를 이마에 새기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정부 측 파트너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이미 정해진 플랜을 추진하면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잃을 것도 별로 없다. 물론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문제가 있지만, 이미 오래전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로 한 바이다. 반대로 노동 측 파트너는 조합원 및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협상 결과에 따라 조합원 및 노동자들의 이해관계 부침의 폭이 크기 때문에 ‘쉽게’ 협상 테이블에 앉기 힘들뿐만 아니라 ‘간단히’ 합의를 도출하기도 어렵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노동 측 파트너가 대표성의 짐을 내려놓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조직률 10%의 노동조합, 그것도 둘로 쪼개진 상황에서 한쪽 노총이 자신 있게 대표성을 자임하기도 쉽지 않다. 다른 한쪽 노총이 대화를 거부하면서 함께 싸우자고 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양대노총의 이러한 행보가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인 것 같기도 하여 앞으로 공동보조 가능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두 조직의 역사를 생각하면 ‘조직’ 민주주의가 ‘계급’ 민주주의로 그 외연을 넓힐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사회적 합의 완성은 위상 격상으로부터
사회적 합의는 일종의 양해각서에 불과하다. 입법부를 거쳐 법률적 효력을 갖추지 못하면 합의서는 말 그대로 몇 장의 종이 위에 그린 낙서에 불과한 것으로 남게 된다. 이러한 사정은 노사정 대화에 대한 기대수준을 낮춘다. 기대수준이 낮으면 참여 의지도 떨어진다. 입법부의 다수 정당이 (행)정부를 운영하는 내각책임제가 아닌 한 이러한 악순환에 대한 우려는 상존할 수밖에 없다. 신뢰 부재의 결과이다. 신뢰 수준이 낮으면 사회적 대화는 시간 낭비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사회적 대화와 그 결과의 합의가 입법화 또는 제도화로 뒷받침될 수 있는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이 경우 당사자들의 일부, 특히 약자가 들러리를 서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회적 대화와 합의는 더욱 신중하게 모색될 것이다. 휴지조각에 불과할 수 있는 양해각서에 서명하기 위해 진을 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노사정위원회 등 사회적 합의체의 위상이 지금보다 높은 수준으로 격상될 필요가 있다.   
 
플랜A, 플랜B, 플랜C를 언제든지 진행할 의지가 있음을 드러내 왔던 바, 정부는 ‘일단 실패, 하지만 잠시 쉬어간 것,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지켜본 재계는 손익계산을 이미 끝냈을 것 같다. 다수이지만 약자인 노동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들러리를 거부한 것에 만족할 수도 있고, 실질적인 정책결정 행위자의 하나로 자신의 위상을 격상시키기 위해 와신상담할 수도 있다. 문제는 정치력이다. 시민사회 밖에서 부유하고 또 그 위에서 군림하는 정부와 정치권을 시민사회 안에 묶어둘 수 있는 실력을 갖추는 수밖에 없다. 공세적으로 사회적 대화를 제안하는 양대노총의 공조도 보고 싶다.
 
노사정위 홈페이지에는 노동시장구조개선특별위원회의 ‘합의초안’이 실려 있다. 특위에 참여했던 한국노총은 출처를 알 수 없는 문건이라고 문제 삼았다. 사회적 대화는 문을 열고 진행되어야 하고 회의 내용은 공개되어야 한다. 혹시 숨길 이유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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