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급은 일반민주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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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을 보는 민중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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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민운동에 대한 단순한 관념들

지난 2월 27일, 시민운동단체들의 연대체인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연대회의)가 출범하였다. 3월 14일에는 민중연대 준비위원회가 출범하였다. 전자는 주로 시민운동단체들이, 후자는 민주노총을 비롯해 민중적 지향을 갖는 단체들이 결합해 있다. 이 두 연대단체의 출범은 앞으로 민중운동이 시민운동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또한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관계를 어떻게 할 지에 대한 고민을 우리에게 던진다.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관계에 대한 가장 ‘즉자적인’ 반응의 하나는 시민운동은 개량적이므로 변혁운동 과정에서 연대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러한 ‘단순한’ 견해를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필자는 참여연대라는 시민운동단체에 몸담고 있지만, 한편으로 민중운동에 대한 귀속감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은 민중운동적 관점에서 쓴다는 점을 밝혀둔다.

필자는 앞의 ‘단순한’ 견해가 ‘본질론적’ 측면에서는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질론적 ‘규정’에 안주하는 것으로 실천적 고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운동이 ‘개량적’이라 하더라도(사실 사회운동단체의 95%가 개량적이다), 이런 규정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민중운동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우선, 시민운동을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민운동은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다양하며, 그 이슈도 그러하다. 페놀 사건 관련 시민운동과 장묘문화 개선운동은 어떤 동질성을 갖는가? 우리는 왕왕 이런 점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은 정치비판적이고 행동적인 성격을 갖는 시민운동에 한정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80년대 후반 이후 경실련 같은 시민운동단체가 시민운동의 상징성을 담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민운동 하면 일종의 ‘사회행동적 NGO'(정부정책을 비판하고 권리옹호운동이나 사회적 캠페인을 수행하는 단체)를 연상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사회행동적 NGO 안에서도 사실 동질적 정체성을 찾기가 어렵다. 필자가 볼 때 사회행동적 시민운동 안에도(물론 그 이념적 지향에서 자유주의 경향이 지배적이기는 하지만), 보수에서부터 자유주의 그리고 진보 지향의 운동까지 혼재되어 있다. 

그리고, 시민운동이 ‘실체적' 개념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 범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민운동가나 민중운동가 모두 시민운동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본래부터 시민운동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노동운동·농민운동·빈민운동을 중심으로 변혁 지향을 갖는 사회운동을 민중운동이라 한다면, 시민운동은 여기에 포괄되지 않는 환경운동·여성운동·인권운동·반부패운동·경제정의운동 등 다양한 운동을 아우른다.  

서준식 인권운동사랑방 대표가 어느 칼럼에서 인권운동은 시민운동이 아니라고 한 적이 있다. 혹자는 이를 들으면서 상식과 어긋난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환경운동이 시민운동인가? 매향리 투쟁은 시민운동인가? 윤금이 살해사건을 다루는 운동은 시민운동인가? 비록 특정 국면에서 개념이 내포적 의미를 갖게 되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기준에서 올바르지 않은 경우도 많다. 예컨대 노동운동은 모두 변혁적인가? 농민운동은 모두 변혁적인가? 빈민운동은 모두 변혁적인가? 그렇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노동운동·농민운동·빈민운동 안에도 온건하고 개량주의적인 운동이 많다. 그런데 민중운동을 변혁적이라 생각하는 것은 반독재 민중운동의 과정에서 노동운동이 변혁 세력으로 주체적 실천을 했고, 그리고 반독재 운동이 변혁 세력이 주도하는 운동영역으로 전화됨으로써, 마치 노동운동·농민운동·빈민운동이 변혁 운동인 것처럼 인식하게 된 것이다. 

군부독재 시절의 한국노총 경우에서 보듯, 합법 공간의 노동운동 세력이 독재의 ‘관변’세력이었기 때문에, 사회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의 정체성은 변혁적인 것으로 설정된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반파쇼 투쟁이 한창이던 80년대 초반에 기존의 보수적 여성운동과 구별되는 진보적 여성운동은 반독재 투쟁에 참여했고, 민중운동적인 정체성을 가지려 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진보 지향성의 여성운동도 시민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자 노력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80년대 후반 이후 비(非)민중운동적 지향을 갖는 세력들이 시민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오늘날에 이르러 시민운동은 포괄성을 가진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다. 80년대 후반 이후 ‘민중운동의 시대는 가고 시민운동의 시대가 열렸다’는 생각을 시민운동가들이 갖고 있었고, 이를 보수언론이 강화하였다. 그 결과 시민운동은 비민중운동적인 온건한 사회운동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최근 상황을 보면, 인권운동의 경우 민중 지향성이 강한 개인이나 집단이 헌신적으로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시민운동보다는 민중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운동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시민운동의 영역을 본래부터 개량적이라고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 민중운동이 지금까지 기반해 온 영역, 즉 반독재 투쟁 과정에서 변혁 세력이 주도성을 확립해 놓은 영역만을 민중운동으로 간주하고, 그 밖의 영역을 시민운동의 대상이라 폄하하면서 적극적인 실천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는 문제다. 필자가 보기에, 이른바 ‘개량적인’ 시민운동이 장악하고 있는 많은 부분은 원래 변혁 지향성을 갖는 운동그룹들이 적극 개입했어야 할 영역이었다. 

2. 시민운동의 보수성과 급진성 회복 문제

이처럼 시민운동이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인 영역으로 가게 된 데는 몇 가지 역사적 배경이 있다. 

민중운동의 임무 방기

우선, 민중·변혁운동이 ‘시민적’ 영역에 적극 개입하기는커녕 방치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80년대 민주화투쟁이 가져온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자율적인 정치·사회 공간의 확보 및 확장이다. 현재의 시민운동이 활동하고 있는 ‘시민적’ 공간은 바로 민중운동의 희생과 투쟁을 통해 얻은 것이다. 정부를 웬만큼 비판해서는 감옥에 가지 않고, 운동가들이 목숨을 건 '결단'을 하지 않아도 되는 오늘의 환경은 민중운동의 희생과 헌신으로 쟁취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민중운동이 자신들의 희생으로 확보한 공간에 주체적으로 개입하지 못함으로써 이 공간이 비(非) 혹은 반(反) 민중운동 영역으로, 나아가 시민운동만의 독점영역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시민운동의 이슈나 영역 그 자체가 본래부터 개량적인 것은 아니다(물론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과 직접 관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량적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가 성립하더라도 환경운동·여성운동·권력감시 운동은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개량성’의 의미는 달라진다. 자본주의 체제 변혁과 직접 연관되지 않더라도, 시민운동의 존재 의의가 부정될 수는 없다. 민중운동 진영은 시민운동이 제기하는 이슈의 ‘개량성’에 주목하기보다는, 오히려 시민운동의 영역을 상대로 한 변혁운동의 실천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의 결과가 나타났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소비자운동의 경우, 체제 친화적인 운동으로 인식되지만, 자본의 전횡에 저항하는 반(反)자본운동의 성격도 갖고 있다. 결과적으로 시민운동의 ‘보수화’ 혹은 ‘자유주의화’는 민중운동의 개입 부재가 낳은 '사생아'다.

둘째, 초기에 시민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가진 보수성과 비민주성 혹은 반민중성을 지적해야 한다. 1989년 7월 창립된 경실련이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중반에 시민운동의 주도단체가 되었는데, 초기 경실련이 비민중운동 성격을 강하게 띤 것도 현재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초기 시민운동그룹은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비정상적으로 우경화 된’ 한국사회의 지형으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수용하는 협소한 전망과 인식 속에서 운동을 전개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시민운동의 온건화는 시민운동 주체들이 기존의 지형을 받아들이면서 온건 전략을 선택한 결과이다. 이 점에서 시민운동의 보수화 혹은 자유주의화는 초기시민운동 주체세력들의 주체적인 이데올로기적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다. 

셋째, ‘위로부터의 보수적 민주화'를 들 수 있다. 1987년 6월 항쟁이 군부독재정권을 타도하지 못하고 6.29 선언으로 ‘주저앉게’ 되면서 1987년 12월에 군부세력이 합법적으로 집권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민주 이행(democratic transition) 국면에 수구세력의 이니셔티브가 강하게 작용하면서, 이데올로기 지형이 보수화 되었다. 보수언론은 이러한 경향을 더 강화하였다. 이런 가운데 신생(新生) 운동들이 민중운동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시민운동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시민운동의 보수·자유주의화의 정치사회적 배경이다. 이런 와중에 시민운동은 ‘개량’ 운동으로 인식되고, 시민운동가들도 이 규정을 수용하게 된다. 따라서 시민운동은 민중운동이 활동하지 않았던 영역에서 진행되는 보수성과 자유주의 지향이 강한 운동이라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시민운동이 가진 보수성을 그것의 이슈와 영역에서 찾는 것은 잘못이다. 문제는 이슈와 영역에 대한 접근 태도이다. 80년대에 우리는 개량과 혁명의 이분법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 기준으로 이야기한다면, 지금 우리에겐 ‘개량에 대한 혁명적 접근법’이 필요하다. 사실 비(非)혁명적 시기의 투쟁은 개량 투쟁의 성격을 갖는다. 즉, 수세기의 투쟁은 체제전복 방향보다는 체제의 ‘합리화’와 개혁으로 귀결된다. 예컨대 재벌이 해체되면 한국자본주의가 자본주의가 아닌 것으로 되는 게 아니다. 노동시간이 단축된다고 한국 자본주의가 극복되는 게 아니다. 

사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주요 이슈였던 ‘직선제 개헌 쟁취’ 투쟁도 ‘개량’ 투쟁이었다. 혁명 시기가 아닌 비(非)혁명 시기에 개량 투쟁이 변혁 투쟁을 저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의 한 구호였던 8시간 노동제, 모든 아동의 무상공공교육, 높은 누진세 등은 그 자체가 혁명적인 요구는 아니다. 결국 문제는 어떤 이슈를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실천하느냐다. 지금처럼 개혁의 여러 영역을 일반적인 이슈라고 해서 방치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이 점에서 필자는 민중적·변혁적 지향을 갖는 실천이 시민운동의 영역에서 폭넓게 전개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환경운동도 더 급진적인 지향을 갖는 실천이 나타나야 한다(물론 변혁적인 생태주의 실천과 변혁적 반자본주의 투쟁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별도로 논의해야 한다).

시민운동, 급진성 회복해야 

시민운동의 주체 역시 시민운동의 ‘역사성’을 인식하고, 시민운동의 온건화 혹은 자유주의화 성향을 성찰하면서 급진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시민운동은 신사회운동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한국의 시민운동은 개발독재 하에서 고착된 국가와 시장의 왜곡을 민주적으로 개혁할 과제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고, 이런 점에서 사실 이른바 ‘구(舊)’사회운동적 성격도 강하게 갖고 있다. 설령 신사회운동으로 규정한다 하더라도, 서구의 신사회운동이 갖는 기존의 경제주의·국가주의 질서에 대한 급진적 저항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구의 신사회운동(전부는 아니지만)은 오히려 체제에 포섭된 노동운동에 대한 반발 속에서 출현한 운동이다. 이것은 노동운동의 틀 속에 포착되지 않는 새로운 이슈들에 대한 급진적 도전의 성격을 띄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서구의 신사회운동은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와 같은 수준으로 민주화되어 있는 서유럽 현실에 대한 저항운동이다. 하물며 훨씬 저급한 민주주의와 천민 자본주의가 자리잡은 우리 현실에서 급진적인 저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러한 신사회운동과 거리가 멂을 반증한다. 이 점에서 현재의 한국현실에 적응하기보다는 그것에 저항하는 급진적인 정체성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국가보안법 철폐 같은 것은 대단히 급진적인 이슈로 여겨지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의 ‘집총 거부’를 많은 사람들은 시민운동이 다루기 어려운 급진적인 주제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시민권·정치권마저 침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정상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뛰어넘어 보다 적극적인 대결 자세를 가져야 한다.

많은 시민운동단체들의 경우 급진성을 포기하고, 부단히 ‘체제내화’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시민운동단체들이 대중성 내지 국민적 지지라는 ‘허상’ 속에서, 자신의 운동을 ‘(개혁)자유주의’ 영역에 가두고 있다. 모든 국민이 지지하는 운동은 현재처럼 정당과 정부의 합리성이 극도로 제약되어 있는 현실에서 개혁적 의미를 갖지만, 이러한 ‘전국민 지지’ 영역에만 한정하면 ‘운동성’을 견지하기 어렵다. 사회운동으로서의 시민운동은 보수적 의식을 뚫고 전개되는 진보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시민운동은 부단히 급진화되고, 진보화돼야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시민운동의 ‘운동성’을 견지하기 위해서도 시민운동의 진보화가 필요하다. 시민운동의 이념적 스펙트럼도 개혁자유주의에서부터 사회민주주의, 급진주의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장되어야 한다. 시민운동은 포섭(co-optation) 위험을 안고 있다. 이 위험성은 정부정책의 합리성이 제고되고, 제도정당의 민주화가 될수록 커질 수 있다.

다행히 90년대 중반 이후, 시민 이슈 영역에서 진보 지향성을 갖고 활동하는 시민운동이 출현하고 있다. 인권운동 영역의 경우, 독립적인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를 둘러싼 인권단체들의 활동은 진보적인 인권운동이 주도하고 있고, 인권운동에서 진보적 정체성, 민중운동 정체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반에 강하게 존재하였던 시민운동의 보수·자유주의 정체성에 일정한 변화가 나타나고, 현실의 다양성에 맞게 시민운동의 정체성 역시 다양화된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이 점에서 시민운동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현재의 자유주의·보수 정체성은 변화되어야 한다.  

3. ‘시민적’ 이슈의 진보성

앞에서는 우리 사회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상호관계를 고찰하였다. 여기서는 이론적 측면에서 시민운동이 다루고 있는 이슈들을 어떻게 파악할지를 살펴본다.  

시민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사회운동의 이론적 쟁점들이 자리잡고 있다.  자본주의의 계급 모순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사회 모순, 그리고 이 모순을 극복하고 해방으로 나가기 위한 실천활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쟁점이 있다. ‘경제환원론적’ 맑스주의를 넘어, 자본주의 계급 모순을 중심 모순으로 수용하면서도 다양한 사회 모순에 대응하는 ‘해방적’ 실천에 대해 적극적인 의의를 부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다양한 사회 모순에는 환경위기, 성불평등, 민족·인종 차별, 참여와 자치, 부패, 동성애, 인권, 보건·의료·교육 등 생활 문제가 포함된다. 20세기의 경험은 계급 모순을 넘어, 다양한 사회 모순에 대한 인식을 통해 해방의 차원을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이를 필자는 억압의 다면성과 다차원성,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해방의 다면성과 다차원성에 대한 인식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해방운동의 다차원성에 대한 인정은 계급 해방 운동의 중심성 명제와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그것이 극복되지 않는 한, 계급 해방 운동의 중심성이 견지될 것이다. 그러나 계급운동의 중심성을 인정하는 것과 다른 운동을 환원론으로 바라보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해방의 프로젝트를 단일한 프로젝트가 아닌 복합적 프로젝트로 인식해야 한다. 

민주주의 투쟁의 중요성

민주주의를 단순히 자본주의 계급 착취의 정치 형식(political shell)으로 인식하는 관점, 즉 민주주의에 대한 도구적·형식주의적 인식을 넘어서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자유주의 이론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에 주목하면서, 국가의 계급성을 부정하는 입장으로 나아갔다. 반면에 맑스는 ‘시민사회의 계급 분열과 시민사회의 지배 계급에 의한 국가의 지배 도구화’라는 통찰을 통해 국가의 계급성을 정식화하는 데 기여했으나, 맑스 이후 맑스주의의 경제환원주의 흐름(스탈린주의를 포함하여)은 국가의 계급성을 환원주의 원칙으로 설정하여, 민주주의를 자본주의 착취의 정치 외피로 간주했다. 그 결과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결합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국가유형’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현실 ‘권력형태’로서의 ‘독재’로 전락하게 되었다. 

20세기 자본주의 착취체제는 그것과 모순되게 결합된 민주주의 때문에,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민주주의를 근거로 한 노동계급의 투쟁 때문에, 자본주의 모순이 극대화되지 않고 거꾸로 규제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반면, 사회주의는 민주주의를 정치 외피로만 인식하고, 말살함으로써 대중을 수동화 하고, 독재 체제로 전락해갔다. 

민주주의는 이전 시기의 계급·사회 투쟁의 결과물이다. 민중의 피로 쟁취한 결과다. 프랑스 혁명이 성공한 후, 부르주아지는 0.5%의 유산자들에게 피선거권을 부여했다. 부르주아지는 근대적인 정치 권리를 유산계급에게만 한정하려 했다. 오히려 민주적 권리를 일반화시킨 것은 노동계급의 투쟁이었다. 그런 점에서 뤼시마이어가 이야기한 것처럼 ‘노동계급 없이 민주주의 없다’. 1944년에 이르러서야 프랑스 여성들에게 온전한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부여된 사실은 민주적 권리의 국민적 확산이 부르주아지의 역할이 아니라 민주적 제도를 이용한 민중 투쟁의 산물이었음을 가르쳐 준다. 민주주의가 곧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주장도 바로 이런 근거에서 제기된다. 

우리 경우에도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민주주의가 복원되었다. 그리고 시민운동의 독점 영역처럼 간주되는 시민운동 공간 역시 이전 시기의 민중투쟁을 통해서 쟁취한 것이다. 비록 과거의 ‘독재’적인 자본주의 ‘지배’체제가 ‘민주’적인 자본주의 ‘지배’체제로 전환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민주주의적 형식을 통해 작동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지배 체제와는 구별되며, 노동계급 역시 바로 그 민주주의 장치들을 이용하여 반(反)국가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람시가 정확히 이야기한대로, 민주주의 혹은 시민사회야말로 지배에 대한 민중들의 동의가 창출되는 제도적 계기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는 민중투쟁이 전개될 수 있는 최소 공간이기도 하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시민운동 영역에 대한 민중운동의 주체적 개입이 부족한 문제는 실천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환원론·도구론·형식주의적 견해와 연관되어 있다. 80년대 식으로 말하면, 일반민주주의(General Democracy) 투쟁을 방기함으로써 이니셔티브가 자유주의 혹은 개혁보수주의에 넘어간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일반민주주의 투쟁을 근대민주주의 안의 독자적인 투쟁 영역으로 간주해야 한다. 문제는 그러한 일반민주주의 투쟁을 어떻게 자본주의 계급 모순에 대응하는 투쟁과 결합할 것인가이다. 

주체적인 비판 정신 위에 선 운동이어야

일반민주주의 투쟁의 독자적인 의의를 인정하는 것은 권력 자체에 내재한 억압성에 대응하는 ‘권력감시운동’의 의의를 인정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국가권력의 계급성과 국가권력 자체에 내재한 억압성은 다를 수 있다. 권력은 그 안에 자기 절대화와 자기 은폐화 경향을 갖고 있다. 권력의 관료화는 여기서 출현한다. 

사회주의 권력의 타락도 사실 권력에 내재한 억압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회주의 사회 내부에서 아래로부터 권력을 통제하려는 민중들의 활동공간을 박탈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권력(사회주의 권력도 ‘권력’인 한)의 자기 절대화와 자기 은폐화 경향은 통제되지 않았고, 이것이 권력을 담당한 개인들의 권력욕과 결합하면서 사회주의 관료독재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민주주의에 대한 도구적·환원론적 인식과 연관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일반민주주의 투쟁의 일부로서 다양한 권력(여기에는 자본권력은 물론 언론권력·행정권력·문화권력 등 다양한 권력이 포함될 수 있다)에 대해 권력의 절대화를 통제하고, 동시에 권력이 가진 억압과 비리의 측면을 투명하게 만드는 운동은 그 자체로 고유한 의의를 가진다. 

우리는 다양한 시민적 운동을 통해서 발현되고 있는 민중들의 자발성의 고양, 주체성의 강화 및 확대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일산에서 벌어진 러브호텔 반대투쟁을 보자. 이것은 변혁적인 게 아니다. 그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과 직접 연결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권력의 결정에 수동적으로 복종해왔던 지역 시민들이 능동화·주체화되어 가는 하나의 표현이었다. 그 속에는 지역주민들이 교육 이슈에 대응하는 저항적 주체성의 발현이 숨어있다. 문제는 이러한 능동화에 어떻게 변혁성을 새겨 넣을 것인가다. 

서울 집중주의에 반대하는 지역운동도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국가주의 통치에 대항하는 ‘자율’ 지향 운동들도 좋은 예다. 이런 예들은 그 자체가 본래 혁명적인 행동은 아니지만(즉, 자본주의에 대한 대립의 의미에서 설정되는 변혁성과는 구별되지만) 그 자체가 갖는 ‘진보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 필자는 민중들의 다층적인 주체화 과정으로 해석한다. 노동자들의 사회주의 혁명은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경제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주체화하는 것이다. 한 노동자는 다양한 사회 관계에서, 피지배자 혹은 종속적 지위에 서 있다. 여성노동자의 경우, 대단히 전투적인 노동운동을 할 수 있지만, 가부장제에 기반한 사회 관계를 수용할 수도 있고, 가부장제 사회 관계에 저항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그녀는 자신의 성과 피지배자라는 위치에서 주체화되는 것이며, 그 자체로 진보적인 의의를 갖는다. 노동자는 학부모로서의 정체성, 환경 피해자로서의 정체성, 세금 납부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다. 정체성이란 무릇 다양한 사회 관계에서 주어지는 지위와 역할을 개인이 수용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한 노동자가 생산관계를 둘러싼 사회 관계가 갖는 착취적 성격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더라도,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는 주체적인 비판 정신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 이 점에서 각 개인이 생산관계가 규정하는 ‘계급적’ 정체성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정체성에 기반한 주체적인 비판의식을 갖고, 이를 실천하는 것은 중요하다.   

4. 시민전선과 민중전선: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동맹 모델의 실현

끝으로 변혁운동, 노동계급 운동이 다른 사회운동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살펴보자. 즉, 노동운동이 환경운동, 여성운동, 다양한 시민 운동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살펴보자. 

여기서 시민운동이 중심이 되어 다양한 시민적 이슈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시민적 투쟁의 전선을 시민전선이라고 하고, 민중운동이 중심이 되어 다양한 민중적 이슈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투쟁 공간을 민중전선이라고 한다면, 민중전선과 시민전선은 앞으로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 한국 사회는 1987년 6월 이후 민주주의로의 이행 과정, 즉 민주개혁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의 도정에 서 있다. 민주주의 이행 과정에서는 민주개혁의 다양한 이슈들, 일반민주주의 과제 해결을 둘러싼 다양한 이슈들, 정치 ‘지체’에서 기인한 다양한 정치개혁 이슈들이 제기된다. 이 점에서 계급 전선으로 ‘환원되지 않는’ 시민 전선이 존재하게 된다. 예컨대 반부패와 같은 ‘국민적’ 이슈가 존재하고 이를 둘러싼 전선이 존재하게 된다. 

앞서 지적한 논의와 연관된 것인데, 시민전선을 보는 데에는 두 가지 편향이 있다. 하나는 시민운동의 이슈들을 ‘국민적’ 이슈로 상정하고, ‘민중적’ 이슈들을 ‘계급 이기주의’적 이슈로 간주하는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편향된 것이다. 한편으로 두 전선은 국민적 전선이 되기 위한 부단한 각축의 과정에 있다. 거기에는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 투쟁의 과제가 존재한다. 민중적 이슈들, 예컨대 민영화문제나 노동시간 단축은 그 자체가 국민적 이슈다. 그러나 왜곡된 이데올로기로 인해 시민운동이 다루는 시민적 이슈만이 국민적 이슈로 여겨진다. 아니 언론들은 그것만을 ‘국민적’ 이슈로 설정한다. 다음 편향으로는 모든 시민적 이슈를 ‘개량적’인 이슈로 간주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편향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많은 시민적 이슈들은 비록 개량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자체가 민중적 투쟁으로 ‘환원’되지 않는 독자적인 의의를 갖는 이슈로 파악되어야 한다.  

시민전선과 민중전선은 별도의 차원이면서 동시에 중첩된다. 향후의 국면에서 두 전선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대립 관계 속에서 시민운동은 건강성을 훼손할 수 있고,민중운동은 대중투쟁의 풍부한 저변을 상실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적극적으로 중첩된 부분을 파악하고, 민중운동이 일반민주주의적 영역에 적극 개입하여 시민전선을 진보적으로 만드는 전략이 필요하다. 일반민주주의 영역에는 노동정치 말고도 생활정치·환경정치·성정치와 관련된 다양한 이슈들이 존재한다. 앞서 지적한 대로, 민중운동은 바로 이러한 운동 영역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또 하나, 연대 문제를 고려할 때, ‘재(再)정치화를 위한 연합전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80년대 전투적인 반독재 '정치' 투쟁이 존재하였던 시기와 달리, 일반 민중은 대단히 '탈(脫)''정치화'되어 있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탈정치화되어 있는 조건을 도외시한 채 민중들의 급진적 정치화를 소망할 것이 아니라, 시민전선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이를 급진적 정치화로 가는 ‘재정치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재정치화를 위한 ‘연합전선'이 필요하다. 다양한 시민 이슈들을 중심으로 조성된 정치적 관심을 이용하여 한국사회를 ‘재정치화'하면서, 그런 속에서 '급진적 정치화'를 위한 토양을 확대해가는 전략이 요구된다. 일종의 이중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두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와 민중연대(준)에 폭넓은 이중 멤버십(double membership)을 허용하도록 하자. 두 연대체에 동시에 가입해 있는, 중첩 지대의 시민·사회단체들이 폭넓게 존재하도록 하자. 향후 활동에 따라서는 두 조직간에 긴장과 균열이 커질 수도 있지만, 이를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두 조직 다 적극적인 고민이 부족하다고 판단한다. 앞으로 민중운동의 연대 질서와 시민운동의 연대 질서를 적극 중첩하려는 시각이 필요하다. 여기서 중첩은 시민운동체들이(특별히 진보적 시민운동체들이) 민중운동의 연대 질서에 적극 참여하고, 민중운동이 시민운동의 연대 질서에 참여하는 상호침투적인 상황을 의미한다. 

둘째, 공동사업을 적극 개발해야 한다. 시민적 이슈들을 중심으로 함께 투쟁하는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 실제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물결과 이 땅에 여전히 강고한 보수가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양자의 공동투쟁은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예컨대, 언론개혁 문제에서 두 연대체가 힘을 합쳐야 한다. 또한 사회개혁투쟁을 조직하는데, 즉 개혁의 사회성을 강화하는데 양자가 함께 싸울 지점들이 많이 있다. 

여기서 중요하게 고려할 점은 양자의 공동사업 이슈들이 항상 변하고, 새로운 가능성이 계속 생겨난다는 것이다. 예컨대, 재벌해체·재벌개혁은 이전에는 ‘과격한’ 민중운동의 이슈였다. 그러나 IMF 이후 이것은 국민적인 이슈가 되었고,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모두가 대결하는 이슈가 되었다. 이 점에서 공동사업을 지속적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 노동시간 단축문제는 머지않아 시민운동도 함께 투쟁해야 하는 공통의 이슈가 될 것이다. 한때는 과격한 것으로 보여서 민중운동만이 껴안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던 이슈들도(민중운동의 투쟁 성과로 인해) 이후에는 국민적인 이슈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어떤 점에서 민중운동이야말로 민중들의 삶에 기여하는, 때로는 급진적으로 보여질 수도 있는 이슈를 끌어안고 그것을 국민적인 이슈로 만들어 해결하는 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이슈가 과격하게 투영되는 것은 지배 블럭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그래서 기존의 지배구조에 균열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지배 블럭이 보수언론까지를 동원하여 그 이슈를 급진적이고 과격한 이슈로 ‘정의’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필자는 민중운동과 ‘개량적’ 시민운동(특별히 진보적 성격을 갖는 시민운동)의 연합 모델이 성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처한 계급·사회 투쟁의 조건과 민주주의 이행국면에서 제기되는 민주개혁 과제의 존재 때문에, ‘전투적 민중운동과 진보적 시민운동의 동맹 모델’이 가능하며, 이를 수행하기 위한 적극적인 ‘인식’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운동은 세계사회운동의 선구적 모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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