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구조조정,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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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율배반적인 정부 정책

국민-주택 두 은행의 파업이 끝났다. 혹한 속의 1주일 투쟁에도 불구하고 노조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렇다고 정부가 승리한 것도 아니다. 두 은행의 합병이 예정대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정부가 국민에게 약속한대로 내년 하반기 이후 경제 및 금융시장의 안정은 기대하기 어렵다. 

두 은행의 파업은 지난 7월 11일 노정합의에서 "우량은행의 강제합병은 없다"는 약속을 정부측이 지키기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정부는 어디까지나 두 은행 경영진과 외국인 주주들이 의도한 자율적 합병이라며 발뺌을 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연말까지 무언가 구조조정의 가시적 성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정부측의 강박관념이 크게 작용했다는 쪽이 설득력이 있다. 당사자인 주택은행의 김정태 행장만 해도 극히 최근까지 두 은행의 합병에 시너지를 기대할 수 없다고 발언하지 않았던가. 

하여튼 금융노조는 12월 28일 오후 파업철회를 선언했고, 두 은행의 합병은 빠른 물줄기를 탈 예정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지금부터다. 도대체 두 은행 합병으로 무엇이 달라지는가. 기업들이 자금줄이 막혀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시장점유율 50%에 육박하는 거대 소매금융 은행이 탄생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정부는 2차 금융구조조정의 방향을 은행 대형화에 맞추었다. 한빛은행과 지방은행을 묶는 지주회사 통합이 그러하고, 국민-주택 합병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는 은행업의 수익성을 높여야 한다는 논리가 주된 근거였다. 규모의 경제에 따른 비용절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너무 놀랍게도 정부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차환물량이 막대하게 몰려있는 채권시장의 경색을 풀겠다며, 은행의 옆구리를 찔러 채권펀드를 연이어 조성할 계획이고, 산업은행을 창구로 신용불량의 회사채를 매입하고 이를 은행들에게 사실상 강제 배분하겠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수익성 잣대를 들이밀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구태의연한 관치금융을 계속하고 있으니 은행들은 진정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하는 것인가.

외국자본에 장악된 금융시장

IMF위기사태 이후 지난 3년간 한국의 금융사정은 크게 달라져왔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외국자본이 금융시장을 사실상 장악하기에 이르렀고, 이들은 월스트리트의 잣대를 예외 없이 적용하고 있다. 

먼저 은행권의 경우 외환, 국민, 한미, 하나, 제일은행의 최대단일주주는 외국계이고, 주택, 국민, 신한은행의 외국인지분율은 50%에 이른다. 급격한 소유구조의 변화 속에서 은행들은 기업금융을 포기하려는 경향을 노골화하고 있다. 즉, 돈을 떼일 염려가 상대적으로 적은 가계금융, 소비자금융으로 사업전략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은행업의 본령이 가계로부터 저축을 끌어다 기업의 투자자금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볼 때, 이는 심각한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주식시장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외국인이 보유한 국내주식은 시가총액의 30%에 이르고 있다. 이는 사실상 거래 가능한 주식가치의 거의 50%에 육박하는 수치이다. 재벌그룹사의 경우 특수관계인 보유지분과 계열사간 상호보유지분의 합계가 약 40%에 이르고 있고 이는 붙박이 투자로서 거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외국인투자자들은 한국기업 중 극히 일부 기업에만 주식투자를 하고 있다. 거의 열 손가락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자본이익률(ROE)을 절대 중시하는 이들이 이번 부실기업 정리조치를 계기로 그간 도외시하던 다수의 기업들을 투자적격으로 판정할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정보력 확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안정성장 산업의 선도기업 외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이제 한국기업들은 내부자금에 크게 의존하는 앵글로-아메리칸 형의 재원조달방식을 그대로 따라가야 할 형편이다. 순이익의 절반을 주주배당금으로 지급하고, 남은 돈에 절대 의존해서 사업을 끌고 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 중장기로 아무리 사업성이 보여도 외부재원조달이 여의치 않으므로 고속성장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한국기업의 투자의사결정권은 월스트리트가 쥐고 있다. 

한국 경제의 중남미화

더욱 큰 문제는 외환자유화이다. 금년 말로 2단계 자유화가 예정대로 추진된다면 개개인의 외화유출이 자유롭게 된다. 국내에서 이렇다할 투자처를 찾지 못한 부유층의 자금은 해외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약 200조원의 시중부동자금 중 10%만 빠진다고 해도, 20조원 혹은 200억 달러 상당의 자금이 유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간 한국은 높은 국내저축을 국내투자로 전환해서 빠른 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국내저축만으로도 충분치 않아 해외저축을 적극적으로 끌어다 쓸 정도로 성장의욕이 왕성했다. 그런데 앞으로는 정반대의 현상이 발생한다. 외국인의 입맛에 맞는 소수의 기업을 제외한 기업들은 투자여력을 상실하게 되고, 이를 이유로 국내 여유자금은 해외로 도피하고 만다. 또한 매물로 쏟아져 나오게 될 많은 기업들은 외국자본 이외에는 팔릴 곳이 없다. BIS 자기자본비율과 미래상환기준(FLC)의 압박을 받고 있는 은행, 부채비율 200%에 묶여 있는 기업들은 아무리 매력적인 매물이 나와도 이를 인수할 여력이 없다. 

이로써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한국경제의 중남미화 시나리오가 작동하고 있다. 그간 IMF와 김대중 정부가 합심해서 끌어온 앵글로-아메리칸형 구조개혁의 경제적 귀결로서 금융종속, 산업주권 상실, 자본해외 도피의 3중고가 중첩되어 나타날 전망이다. 이것이 2라운드 경제위기의 핵심적인 진상이다. 

잘못된 구조조정 

돌이켜보면 한국경제의 구조개혁은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다. 미국과 사회경제적 조건이 무엇하나 유사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안부재라는 이유만으로 밀어 붙여온 난센스 개혁은 도대체 국민을 무엇으로 먹여 살릴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특히 은행을 수익성 잣대로 키우겠다는 것은 한국 실정에 전혀 맞지 않는다. 월가의 높은 수익성 기준을 따르라고 강요하면 한국의 은행 중 기업금융에 나설 은행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고, 이것은 기업의 대량 도산을 부르게 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한국이 1인당 소득 3만 달러로 사정이 전혀 다른 미국의 금융기준을 따라야 한다는 말인가. 무엇으로 실물경제를 키우고 무엇으로 일자리를 창출할 것인지 정부정책으로부터 고민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금융산업은 역사적으로 실물경제의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태동했고, 잘사는 나라들은 예외 없이 무역·제조업에 대한 확고한 기반을 토대로 금융산업을 키우고 있다. 근년 한국에는 금융의 시대가 너무 빨리 다가오고 있다. 자생력 있는 제조업의 강고한 기반 없이 너무도 성급하게 금융지향성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은 향후 2∼30년간 제조업의 발전에 승부를 걸 수 있는 여지가 대단히 크다. 은행권을 중심으로 기업에 안정적인 자금의 공급을 기하고, 이로써 기업이 장기전략을 구사하면서 현장의 생산성을 높이고 차별적인 핵심역량의 축적을 꾀한다면 한국의 제조업에는 승산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은행산업을 그 자체의 고부가 가치성이나 수익성만을 잣대로 개편해서는 안 된다. 제조업의 지속적 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은행시스템을 어떻게 디자인 할 것인가를 중시해야 한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은행통폐합의 구상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금융중개기능이 마비된 상황에서 과연 은행간의 짝짓기가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 은행이 대형화되었다고 기업자금난에 숨통이 열리는 것도 아닌데 이것을 마치 마법의 열쇠인 듯 국민을 호도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한국의 은행은 아직 국제경쟁에 나설 때가 아니다. 세계 50위권의 은행이 나와야 할 이유가 없다. 덩치 키우기보다는 효율적인 경쟁체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시급하다. 은행 숫자가 많은 것도 아닌데, 통폐합이 과도하게 진행하다 보면 오히려 독과점의 폐해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가급적 다수의 은행으로 하여금 착실하게 신용평가능력을 쌓아 기업에 안정적인 자금을 공급하는 은행 본연의 기능을 복원하는 것이 시급하다.

한편 지방은행의 처리에 극히 신중해야 한다. 무조건 금융지주회사에 통합시켜서는 안 된다. 가능한 한 독자 회생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일자리의 창출은 대기업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사회안전망은 중소기업의 육성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이를 위해서는 '지방경제 활성화-지방은행 육성'이 전제로 되어야 한다. 

정부의 금융정책은 실패했다

이제 정부는 정책실패를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은행중심의 금융시스템을 자본시장 중심으로 바꾸겠다는 비현실적 정책 방향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은행을 중심으로 하는 금융시스템을 복원해야 한다. 그렇다고 과거의 부정부패형 관치금융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은행원 혹은 노조의 지배구조 참여를 통해 '무모한 관치금융 - 재벌기업의 중복과잉투자'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차단해야 하고, 이미 지배력을 확보한 외국인 대주주의 단기적 수익성 논리와 경영상의 전횡을 견제해야 한다. 

은행은 기업인 이상 수익성을 추구해야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공익적 지원산업으로서의 특성을 갖는다. 특히 한국이 제조업을 제대로 하려면 그러하다. 따라서 이러한 상충적 목표를 추구해야 하는 은행은 가급적 국적을 지켜야 한다. 새로운 공적자금의 투입이 계기가 되어 외국계 자본의 영향권에 들어간 은행업이 일부 국적을 재탈환할 수 있어야 한다. 

은행업은 전체 경제시스템의 하부를 형성하는 서브시스템(sub-system) 중의 하나로서 전체 최적화를 위해 디자인되어야 한다. 이 같은 실물의 고민을 담지 않은 은행업 단독의 구조조정은 한국에 있어 노동의 종말을 앞당기는 것이기에 노동계로선 거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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