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장엔 비상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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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예전과는 달라진 것들이 더러 있다. 그중 하나가 주말이나 휴일에는 집회나 수련회를 제외하고는 공식적인 일정을 잡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합원은 물론이거니와 간부들조차 반기지 않는다. 하기야 합법적인 노동조합 활동의 공간이 넓어지기도 했거니와 사람이 어찌 휴식 없이 일할 수 있을까?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불가피하게 주말에 일정을 잡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에도 토요일에 조합에 서 모임이 하나 있었는데, 한 조합원이 집에 일이 있어 참석하기 어렵다는 연락이 왔다.

"뭐, 사정이 있으면 할 수 없죠. 모임 결과를 따로 알려 드릴 겸해서 다음주 중에 소주나 한잔하시죠."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입수된 정보는 그 날 조합원 두어 명이 경마장엘 갔다는 것이었다. 함께 간 조합원 중 한 명이 술자리에서 양심고백(?)을 하면서 들통이 난 것이다.

"이렇게 공부했으면 서울대도 갔겠다"

주말 경마장은(과천뿐만이 아니라 각 지역에 있는 TV경마장까지) 발 디딜 틈 없이 꽉꽉 들어찬다는 것은 이미 몇 해 전부터 매스컴을 통해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어림잡아 헤아려보면 임금수준이 낮고 연령이 높은 남성 노동자일수록 경마장 출입을 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내가 노동조합에서 전임활동을 하기 전까지 다녔던 공장은 종업원 수로는 대기업으로 분류되는 제법 큰 공장이었다. 여기서도 상황은 더하면 더했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월요일과 화요일 점심시간과 퇴근 후 막걸리 한잔하는 자리에서는 무용담(?)을 말하기에 정신이 없다. 우리가 하는 우스갯소리 가운데 '3대 거짓말'이라는 게 있다는데, '처녀 시집 안 간다'는 말과 '늙은이 빨리 죽어야지'하는 말 그리고 '낚시꾼 놓친 고기 월척이었다'는 얘기가 그것이다. 그런데 주말 경마장에서 있었던 얘기도 결코 이에 뒤지지 않는다.

간혹 돈 좀 따온 동료가 음료수 한 병씩 돌려서 얻어먹는 맛도 있기도 한, 주초 월요일과 화요일은 하여간 이런 얘기 듣기에 바쁘다. 그리고 수요일부터는 모두들 수험생이 된다. 책 한 권을 사들고는 분석을 하기 시작한다. 금요일까지 '그룹스터디'도 한다. 이러면서 나이 드신 노동자들이 하는 말씀이 "내가 학교 다닐 때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으면 서울대학교 갔을 것"이라는 것이다. 정말 열심이들 공부한다.

그러면서 주말을 기다린다. 주말 야근이라도 걸릴라치면 일찍 퇴근하는 동료에게 메모와 돈을 건넨다. 몇 경주에 몇 번 몇 번을 사달라는 부탁과 함께.

주말이면 더 바쁜 노동자들, 가자 경마장으로!

이 나라에 경마장이 운영된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경마장 열풍이 몰아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물론 그 전에도 경마장을 출입하는 노동자들은 있었지만 내놓고 경마장 다닌다는 얘기하기를 꺼려했다. 그런데 소위 IMF 이후에는 상황이 변했다. 공공연한 주말 일정으로 자리 잡고 나름대로 자기 합리화를 하기도 한다.

이 결과가 좋을 리야 만무하지 않겠는가? 실례로 한 노동자는 빚내다가 자동차 잡히고 집을 담보로 잡혀 결국은 집까지 날려 버리고 이혼까지 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 사람이 남부끄러워 그 직장을 어찌 계속 다니겠는가? 결국 사직서를 냈는데 이혼한 부인이 회사를 찾아 왔다. 매달 자녀 양육비를 내기로 했는데 이혼한 남편이 이 직장을 그만두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이 사람 사직서를 받지 말아 달라고 통사정을 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사직서는 반려되고 주위에 따가운 시선을 받아가며 그렇잖아도 고역의 노동이 더욱 더 힘든 노동일이 되고 말았다.

이들이 경마장을 찾는 이유는 간단하다. "주말이나 휴일이라고 해도 딱히 할 일도 없고, 스트레스를 푸는 데는 그만"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잘만하면 용돈벌이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앞에서 예를 든 이 노동자에 대해서는 비난의 화살을 쏟아낸다. "절제를 못한다"느니 하면서…

'대박' 신기루 끝에는 뭐가 있을까

하기야 딱히 할 일도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노동자에게 -특히 영세사업장노동자, 저임금노동자들에게- '여가를 이용한 문화생활'이라는 것은 사치스러운 개념일 뿐이다. 기계 앞에 걸려 있는 달력에는 이상스런 숫자들이 빼곡이 적혀 있다. 현장노동자들이 자신이 할 연장근로 시간을 써 놓은 것이다.

'일찍 퇴근하고 나가봐야 돈밖에 더 쓰냐? 차라리 연장근무나 해서 돈 벌자'는 것이 대체적인 분위기다. 아주머니 노동자들은 특히나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누구는 이번 주에만 야근을 세 번이나 했는데, 나는 한번 밖에 못했다"고 과장에게 항의하는 일이 다반사다. 분위기가 이러할진대 토요일 잔업 없이 일찍 끝나거나 휴일 특근이 없으면 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아니면 용돈벌이라도 해보겠다고 경마장을 찾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일 수도 있다.

결혼한 남성노동자들이 경마장을 찾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한 푼이라도 벌자고 비정규직으로 용역 사원으로 취업을 하거나, 동네 아주머니들끼리 서로 돌아가며 애를 봐주고 자동차에 명함 꽂기, 찌라시 돌리기라도 마다하지 않는 아내에게 경마장 간다고 돈 달라면 대번에 "이 인간이 미쳤나?"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 뻔하다. 그러니 거짓말을 한다. 또는 신용카드를 뽑아 든다.

딴에는 모두 다 돈을 따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닭이라도 한 마리 튀겨 가면 식구들하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겠지', 혹은 '다음주에 퇴근 후 동료들과 막걸리 한잔 할 용돈은 벌겠지'하는 마음들이다. 허나 현실이 어찌 그런가? 하루 경주가 다 끝나기도 전에 밑천 떨어지면 궁상맞은 표정으로 남들 하는 거 기웃거리고 돈 좀 꿔볼 요량으로 넌지시 같이 간 동료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혹여 '대박'이라도 맞는 사람이 있으면 개평이라도 좀 얻을까하고 끝까지 기다린다. 함께 간 동료들이 몽땅 주머니를 비우고 돌아올라치면, 그 청승맞고 가련한 모습이란….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패인을 분석하고 또 오기롭게 다짐한다. 그리고 혹여 돈 좀 불려서 나와도 오는 길에 술 한잔하고 나면 의기양양하게 돌아서는 순간, 공짜 술 한번 먹는 것으로 다 끝난다.

그 무엇보다 문제는 일확천금에 대한 환상이라는 큰 병을 키워가고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모두들 '오락'이라고들 항변하지만 결국은 대박을 꿈꾸는 것이 그 본심들인 걸 어찌 모르겠는가.

허우적댈수록 가라앉는 노동자들

현대 자본주의를 카지노 자본주의라 하지 않던가? 온 나라가 도박으로 들끓는다. 나라는 그것을 권장한다. 경마장 운영권을 놓고 정부 부처가 볼썽사나운 싸움을 한다. 경마에 이어 경륜, 경정을 하고 있고, 또 그 뭐냐 개 경준가 뭔가를 한단다. 각 지방자치단체는 도박장을 유치하기에 혈안이다. 복권은 또 어떤가? 수십 종의 복권이 난립을 하더니 급기야 '로또'라는 괴물을 탄생시켰다. 노동자들이 이런 도박판에 열광을 하는 것은 단 하나, 탈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대박', 일확천금만이 유일한 희망으로 남아 있다.

좀 지나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가리봉 5거리와 을지로 인쇄골목에는 소위 '찻집(?)'이라는 술집이 즐비했다. 여느 술집과 달리 여자접대부가 술시중을 드는 이런 술집은 아무래도 금전적으로 부담이 가는 술집이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즐비하게 늘어섰던 것은 남성노동자들에게 그 만큼의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헌데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당시에 일당 6천원이었던 노동자가 최소한 3만원 이상으로 임금이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더 이상 이런 술집을 드나들 수 없는 형편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질적 풍요? 이제는 노동자들이 자가용이 몰고 김치냉장고에 에어컨을 갖고 산다고, '살만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 가난한 노동자들에게는 아등바등, 아귀다툼이라는 말 이외에 달리 삶의 모습을 표현할 만한 단어는 없다. 더욱이 노동자 가정을 절망으로 내모는 것은, 뼈 빠지게 일해도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꺾이고 있다는 것이다.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가라앉는 늪과 같이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일하고 살지만 점점 더 사회적 평균치 밑으로 가라앉는다.

가난한 노동자들의 탈출구는?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러한 현상을 -열심히 일해도 점점 가난해지는- 사회적 문제로 돌려세우고 평등과 공공성의 강화라는 당당한 자기주장을 펴는 것에까지는 생각이 못 미치는 것 또한 현실이다. 가난의 문제는 개인의 책임이라고 세뇌되어 온 노동자들이 결국 찾을 수 있는 돌파구는 '대박'에 대한 환상일 뿐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입안하고 노무현 정부에서도 이어받은 노동부의 저소득근로자(working-poor) 복지문제에 대한 종합대책인 근로자복지증진기본계획에 따르면, 역설적이게도 근로빈곤계층의 증가와 소득불평등 심화를 해소하기 위한 각종 정책의 재원 마련 방안을 '복권판매'에 따른 수익에서 대부분을 찾고 있다. 이러한 현재의 정책구조라면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이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 가난한 노동자들은 복권을 열심히 구입해야 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추락하는 가난한 노동자 가정을 멈춰 세울 장치를 우리 사회는 갖고 있지 못하다. 오늘도 을지로 작은 공장의 한쪽 편에 켜져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경마방송 아나운서의 현란한 음성이 기계소리와 뒤섞이고 있다. 그 현란한 소음이 뿌려대는 '대박'이라는 신기루말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진정한 오아시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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