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장악’ 눈보라, 뚜벅뚜벅 뚫고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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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용에 맞서라
두려움에 맞서라

-요한 프랑크


오늘로 ‘공정방송 사수 낙하산 반대’ 투쟁 137일이 지났습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이러다 눈 올 때까지 해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던 게 엊그젠데 며칠 전 첫눈이 와서 이 말이 현실이 됐고, 지금은 해를 넘길 수도 있겠다는 걱정도 드는 게 사실입니다.
지칠 때도 됐고 포기할 만도 한데 잘도 버틴다고 여기저기서 과분한 상도 주시고 칭찬도 해주셔서 더욱 힘을 내서 싸우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해고하고 징계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상주는 사회. 2008년 겨울 대한민국 언론의 현주소, 제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YTN이 맞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유발언, 그게 그리 힘들 줄이야

매일 아침 투쟁을 김밥으로 시작합니다. 
이른 아침 출근저지 집회를 하다 보니 식사를 챙기지 못하고 나오는 선후배들이 많아서 같이 은박지에 쌓인 김밥을 까먹으며 대오를 갖춥니다. 백일 넘게 먹다 보니 거르면 허전하고 힘이 나지 않습니다. 물론 아침 메뉴의 다양화를 외치며 빵이나 따뜻한 국물을 주문하는 동료들도 있지만 그래도 김밥 한 줄만으로도 아직까지 저희의 집회장에는 ‘해피 바이러스’, ‘웃음 바이러스’가 넘쳐납니다.

김밥으로 보급 투쟁을 마친 다음에는 곧바로 집회를 시작합니다. 노종면 지부장의 인사말이 끝나면 조합원들의 자유발언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 자유발언이라는 것이 썩 자유롭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말과 글을 업으로 삼고 있는 기자들에게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결의에 찬 투쟁사를 한다는 것은 분명 부담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원고도 없이 한 시간씩 생방송도 하는 사람들이 고작 몇 분에 불과한 자유발언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모습을요. 하지만 이 자유발언이라는 게, 큰 부담만큼 동료들의 가열찬 투쟁사를 들었을 때의 감동도 진하다는 것을 집회를 거듭할수록 느끼게 됩니다. 미리 준비되지 않은, 바로 그 순간의 느낌과 각오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가슴 속 울림이기 때문이지요. 선배의 투쟁사를 들으며 머릿속에 더욱 알찬 논리를 갖추게 되고, 후배의 투쟁사를 들으며 가슴 속에 더욱 뜨거운 의지를 담게 됩니다.

언론특보가 공정방송을? 가당키나 한가요!

하지만 130일 넘게 출근저지 투쟁을 해오면서 구본홍 씨를 만나는 건 열 번에 한 번 꼴입니다. 구본홍 씨는 자신을 반대하는 목소리에 맞서는 것이 부담스러워서인지, 저희가 집회를 하고 구호를 외치면 회사 안으로 잘 들어오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는 아예 출근을 스스로 포기하고 호텔 회의실을 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의를 핑계로 호텔에서 쓴 돈만 수천만 원에 이를 정도니 과연 YTN의 비상경영이 안중에나 있는 분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지난 10월29일에는 회사 후문 앞에서 구본홍 씨와 YTN 노조원들 간에 ‘입담’ 대결이 펼쳐졌습니다. 구호도 외치지 않고 대오를 지어 서 있지도 않고 노조원들이 구본홍 씨 앞에 앉아서 묻고 싶은 것을 마음껏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난 대선 당시 특정 캠프에서 영혼을 팔았던 특보 출신으로서 공정 방송을 제일 가치로 삼는 YTN의 사장이 될 자격이 있느냐”는 저희 투쟁의 근본 이유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말문이 막히니 돌아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더니 한 달 가까이 회사 근처에는 나타나지도 않더군요. 구본홍 씨 와병설도 돌고 사퇴설도 돌고 갖가지 설이 난무했습니다. 언론사 사장 되겠다는 사람이 자신의 결격 사유에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회사 근처에는 나타나지도 않으니 누가 그 사람의 자질을 인정해 주겠습니까?

구본홍 씨는 그러더니 11월25일, 조합원들이 퇴근한 야밤을 틈타 회사에 잠입했습니다. 아침부터 실·국장 회의를 주재하며 부산을 떨더니 회사가 정상화되기 전까지는 한 발도 나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기를 엿새, 구본홍 씨는 돌연 외부 일정을 핑계로 회사 밖으로 나갔습니다. 또 언제 회사에 ‘잠입’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지금까지 YTN에 나타나서 구본홍 씨가 보여준 유일한 특기였으니까요.


[ YTN지부의 투쟁에는 시민들도 지지를 보내고 있다. 11월26일 ‘방송장악·네티즌탄압저지범국민행동’의 방통심의위 'YTN 블랙투쟁 심의' 중단 촉구 기자회견. ▷ PD저널 ]

믿었던 선배들의 안타까운 침묵

구본홍 씨 출근 저지 투쟁을 시작한 뒤 저희를 가장 슬프게 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 YTN을 함께 이끌어온 부·팀장급 선배들이었습니다. 후배들을 바른말 하는 기자로 키워놓은 선배들이 구본홍 씨에 대해서는 한없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회사를 정상화시키는 데 힘을 보태기는커녕 오히려 후배들의 투쟁을 방해하는 데에만 힘을 기울였습니다. 심지어 인사위원이자 보도국장 직무대행인, 그리고 분과 인사위원장이자 경영담당 상무인 선배 두 분이 휴일에 잘 근무하고 있는 후배 2명을 회사의 집기를 파손한 범법자인 양 누명을 씌우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두 조합원은 영문도 모른 채 증거가 있다는 인사위원장의 협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인사위원 2명이 후배 기자 2명의 인권을 짓밟은 중대한 사태였습니다. 하지만 사태는 두 인사위원의 전적인 오해였던 것으로 드러났고, 증거가 없으면 책임을 지겠다고 후배들을 몰아세우던 두 사람은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로 사태를 무마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매일매일 분노와 맞닥뜨려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YTN 가족들은 조급해하지도 않고 딱 절망하고 분노할 만큼만 감정을 통제합니다. 이젠 “꽃피는 봄이 올 때까지 즐겁게 싸우자”고 합니다.

어느 후배가 게시판에 글을 올렸습니다. “눈길을 걸을 때는 자신의 발자국이 뒤따르는 사람의 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길을 만드는 사람의 심정으로 후배들을 이끌어야 할 선배들의 무책임함에 때론 좌절하고 기자생활 자체에 회의를 갖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넓게 보면 구본홍 씨조차도 언론계 선배 아닙니까. 하지만 저희는 먼저 걸어간 사람들이 남겨둔 잘못된 발자국에 슬퍼하고만 있지 않겠습니다.

잘못된 발자국 고쳐가며, 뚜벅뚜벅 걸어가겠습니다

눈길을 걷기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방송 장악 시도라는 현 정부의 언론 정책이 저희에게는 눈보라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목적지가 언제쯤 나올지 모를 눈길을 걷고 있습니다. 먼저 걸어간 사람들이 남겨둔 잘못된 발자국을 따라 걷지 않겠습니다. 바른 길을 만들어가는 사람의 마음으로 뚜벅뚜벅 걷겠습니다.

수십 년 전 온몸으로 권력과 자본에 저항하다 먼저가신 선배들이 훗날 이 시대의 대한민국 민주언론, 공정방송을 물을 때 그 대답이 YTN이 될 수 있는 그날이 반드시 올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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