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영어교육과 비정규직(한겨레신문 2008.1.29)

1.

요즈음 국내 주요 대학에서는 영어강의를 늘리고 있다. 아직은 우리말 강의가 대부분이지만, 한 학기에 서너 과목을 영어강의로 개설하는 대학도 있고, 교과목의 절반을 영어강의로 개설하는 대학도 있다. 새로 채용하는 교수들에게 3년 동안 영어강의를 의무화한다든지, 영어강의를 맡은 시간강사에게 강사료를 두 배 얹어 지급하고 있다. 세칭 명문대학에서도 토론식 수업은 기대하기 어렵고, 전공수업의 질과 학문적 깊이가 떨어진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지난 22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지금 중학교 2학년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내후년부터, 수학·과학 등 영어 이외의 과목을 영어로 수업하는 ‘영어 몰입교육’을 시행하겠다고 했다.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세계화 시대에 고등학교만 나와도 전국민이 영어로 소통할 수 있게, 영어교육의 틀을 완전히 바꾸기로 결정했다”며, “우리의 목표는 공교육을 정상화해 사교육을 없애는 것이며, 영어교육 개선의 최종 목표는 기러기 아빠를 없애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러기 아빠’ ‘펭귄 아빠’라는 이산가족 현상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데는 자못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그렇지만 사교육을 없애겠다는 인수위의 바람과 달리, 사교육 시장은 이미 영어특수로 들썩이고 있다. 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 그만큼 조기유학과 어학연수가 늘고, 기러기 아빠도 늘어난다. 세계화 시대라지만 과연 우리 국민 가운데 영어로 소통할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이 몇퍼센트나 되는지도 의문이다. 대다수 국민이 실제 생활에서 거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영어 소통 때문에, 모든 고등학생이 영어로 수업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자꾸만 일제 말 조선어 말살정책이 생각나는 것은 단순한 기우에서일까?

굳이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생들에게 영어 몰입교육이니 해서, 수험생 부담을 늘리고 사교육 시장을 살찌울 이유가 없다. 초중등학생이 아닌 대학생이 유학이나 국외연수를 가면 기러기 아빠가 생길 이유도 없다. 더욱이 인수위원회의 50대, 60대가 젊었을 때보다 요즈음 젊은이들의 영어 실력이 훨씬 뛰어나다.

2.

지난 24일 한강대교 아치에는 “이명박 당선인은 비정규직의 절규를 들어라”는 펼침막이 걸렸다. 지난해 9월 노조를 설립한 지 한달 만에 해고된 지엠대우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영하 10도의 강추위 속에 한강대교 아치 위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이며 내건 펼침막이다. 고속철도, 이랜드, 코스콤 등의 비정규직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채 해를 넘긴 지 오래다.

인수위원회 홈페이지에는 “국민을 잘 섬기겠습니다. 국민에게 희망을 드리겠습니다”는 글귀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정책제안방에는 3만여 건의 제안이 들어와 있는데, 이 가운데 “학교 비정규직의 처우도 개선해주세요”는 조회건수가 4만5천 건이 넘고, 댓글이 560여 꼭지가 달렸다. “비정규직이 그렇게 세상에 큰 죄를 지었는지 … 코스콤 노동자는 억울합니다”는 조회건수 9천회가 넘고, 댓글이 330여 꼭지가 달렸다. 그렇지만 아직 인수위원회가 이들 제안을 수용해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방안을 마련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지난 한 달 동안 인수위원회는 한반도 대운하 건설, 통일부 폐지, 고교 영어 몰입교육 등 메가톤급 이슈를 잇달아 발표했다. 그렇지만 이들 정책은 대부분 설익은 상태로, 국민들은 벌써부터 피곤해 한다. 이제 국론분열 양상마저 빚고 있는 설익은 정책은 뒤로 물리고, 중소영세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똑같은 국민으로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정책 하나쯤은 발표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인수위원회의 남은 한 달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