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현장에서 다시 꽃피고 있는 노동문화

노동사회

투쟁현장에서 다시 꽃피고 있는 노동문화

편집국 0 4,606 2013.05.29 09:53

우리는 흔히 ‘문화’라고 하면 연극이나 영화를 보는 것, 고전(대중)음악을 듣는 것, 혹은 우아한 미술관에서의 미술품 감상이나 그것도 아니면 나이트클럽, TV 등을 떠올리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문화 역시 상품화되고,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문화는 상품문화이고 소비문화이다. 그렇다면 이에 맞서는 노동자의 문화는 어떠해야 할까?  

투쟁현장에서 다시 핀, 여린 희망의 꽃봉오리들

노동자 스스로 만들고 공연하던 노동문화는 언젠가부터 노동현장과 투쟁현장에서 줄어들거나 사라지기 시작했다. 따라 부르기 쉬워 모두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은 점점 줄어들고, 어느새 노동자들은 집회나 투쟁 현장에서 노동문화의 주체가 아니라 전문가들의 공연을 감상하는 관객이 되었다. 집회는 너무나 지루하고 식상해졌다. 주루룩 이어지는 유명 인사들의 일장 연설, 그리고 전문 가수 몇 명의 공연을 감상하고 다 같이 구호 몇 번 외치는 것이 집회의 전형으로 굳어지다시피 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집회문화를 바꿔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게 이미 오래 전이다. 이렇게까지 된 것은 한편으로는 장시간의 노동시간으로 노동자들의 다양한 소모임 활동이 어려워진 탓과, 민중·노동문화도 ‘대중화·전문화’ 되기 시작하면서 전문적인 문예 일꾼들에게 창작과 연주가 전담된 데에도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비정규직 철폐 투쟁이 본격화됨에 따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장기투쟁이 곳곳에서 전개되면서, 투쟁현장에서 다시 노동문화가 꽃피기 시작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이랜드일반노조다. 그들의 투쟁현장에서 다시 피기 시작하는, 작고 여리지만 희망 어린, 노동문화의 꽃봉오리들을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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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랜드 율동패 '새벽'과 '신화'의 공연 ]

‘노동자 가수’의 데뷔(?)와 패러디 춘향전

홈에버 시흥분회에는 농담 반으로 ‘SM사단 소속 가수’라 불리는 노동자 가수가 있다(‘SM사단’의 ‘SM’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투쟁하는 곳이면 언제나 달려가 함께 하기 때문에 이랜드 명예조합원이 된 노동자 가수 ‘김성만’의 이름을 딴 이니셜이다. 대중음악 시장의 최대 자본인 ‘SM엔터테인먼트’와 이니셜이 같은 데서 착안된 해학이다). 이랜드 노동자들의 투쟁이 장기화 되면서 매일 분회별로 선전전과 집회를 진행하다 보니, 노동자들 스스로 집회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은 물론 집회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마이크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유독 자주 불려나가 노래를 부르게 된 노동자가 있었으니, 노동자 가수 ‘김성만’은 이런 노동자들이 바로 ‘노동자 가수’이며 ‘노동자 가수’는 이렇게 데뷔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하고 농성을 하는 와중에 월드컵분회 조합원들은 긴박하면서도 지루한 점거 농성에 참여한 조합원들과 연대단위의 동지들을 위해 연극을 준비했다. 처음엔 전문 연극패에서 활동하는 강사의 도움도 받았다. 그 경험을 살려 ‘이랜드 투쟁 200일 문화제’ 에선 ‘패러디 춘향전’을 공연하여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모든 배우들이 무선 마이크를 쓰기 어려운 집회 공연의 특성 때문이었는지, 변사가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칼을 쓴 노동자 춘향이와 이랜드 자본을 상징하는 ‘변사또’를 중심으로 펼쳐진 패러디 춘향전은 풍자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줬고, 집회 참가자들에게 통쾌하고 즐거운 웃음을 선사했다. 

특히 이랜드투쟁 200일 문화제는 발언, 연극 공연 등 조합원들의 참여가 돋보이는 문화제였다. 문화제에 참석한 조합원들은 물론 연대하러 온 모든 참가자들은 세 시간이나 되는 집회 시간 내내 조금도 지루한 줄 모른 채 뛰고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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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가바' 공연을 하고 있는 월드컵분회 조합원들 ]

파업 학교에서 배운 율동의 원숙미

이랜드에는 두 팀의 율동패가 있다. 2005년 면목분회가 결성되면서 꾸려진 율동패 ‘새벽’은 2007년 투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꾸준히 활동해왔다. 2007년 월드컵분회가 결성되면서 5월부터 시작된 점거농성 중 꾸려진 율동패 ‘신화’ 역시 춤추는 여성노동자들이다. 이후 이랜드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새벽과 신화, 두 율동패는 언제나 투쟁 현장에서 춤을 추었고, 연대단위의 투쟁에도 달려가 춤을 추는 여전사들이었다. 새벽과 신화는 각자 또는 함께 공연하고 있는데 이제는 거의 전문 율동패의 풍모를 갖춰가고 있다. 노동자들의 문화가 발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현실에서 노동자문화는 파업이라는 학교에서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며 진행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제는 노동자들의 문화공연이 원숙미를 더해가면 더해갈수록 한편으로는 점점 더 서글퍼진다. 노동자 문예패들의 공연이 전문적인 수준에 도달하기에 들어갔던 시간과 노력만큼, 그들의 투쟁은 힘들게 지속되었을 테니까…….

목소리, 노동자들의 목소리

♬ 연대 필요할 땐 나를 불러줘, 언제든지 달려갈게. 낮에도 투쟁, 밤에도 투쟁, 언제든지 달려갈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르면 한참을 생각해 보겠지만, 동지가 나를 불러준다면 무조건 달려갈거야. 동지를 향한 나의 연대는 무조건 무조건이야. 동지를 향한 나의 사랑은 특급 사랑이야. 이랜드를 넘어 뉴코아와 함께 기륭전자 코스콤까지 (재능, 한솔, 코롱, GM대우 넘어, 신공항 전해투까지) 동지가 부르면 달려갈거야, 무조건 달려갈거야. ♬
- <무조건무조건이야>,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부르기), 홈에버 월드컵분회 조합원들, 300일 투쟁문화제 -


4월19일 이랜드 투쟁 300일을 맞아 진행된 ‘300일 투쟁문화제’는 하나의 원칙 아래 기획되었다. 가능하면 전문 가수나 문예패가 아닌 아마추어 노동자 가수나 문예패를 중심으로 섭외하고 공연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투쟁 현장에 늘 함께 했던 노동자 가수 김성만을 비롯하여 몇몇 전문 가수들과 송경동 시인 등이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 시간 동안 진행된 문화제는 홈에버 월드컵분회 조합원들의 노가바, 면목분회 조합원들의 율동, 울산분회 조합원들의 공연, 이랜드 율동패 새벽·신화의 율동과 같은 조합원들의 공연과 조합원들이 직접 쓰고 읽는 편지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지하철 노래패 소리물결’, ‘전교조 의정부분회 노래패’, ‘맹호운수 풍물패’ 등  연대단위 노동자들의 공연이 함께 하는 내용으로 치러졌다.

1980년대에만 해도 노동자들의 투쟁현장에서 흔히 들을 수 있었던 풍물 소리,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통쾌하고도 상쾌하게 바꿔서 노래하던 ‘노가바’, 「노래로 보는 노동운동사」를 쓸 수 있을 만큼 다 같이 함께 춤추고 함께 부르던 노동·민중가요 등이 다시 집회 현장에 등장한 것이다.

피어나라, 노동운동의 ‘꽃다지’로

이렇게 자신들의 노동 속에서, 자신들의 투쟁 속에서 살아가고 어울리며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생생한 육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노동문화가 노동운동 속에 정착하는 일은 아마도 시간이 좀 더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투쟁 속에서 산발적으로 꽃피기 시작한 노동문화가 이런저런 소모임 등의 형태로 다양하게 조직화될 때에 더 빠르게 정착되고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 속에서 피워내고 있는 노동문화의 꽃들이 전체 노동운동에 활짝 핀 꽃다지로 자라나길 간절히 바란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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