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로 갈 수 있을까

노동사회

한국은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로 갈 수 있을까

편집국 0 4,331 2013.05.29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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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8년 4월30일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주최 토론회 “노동자 정치세력화, 버릴 것과 살릴 것”의 발표를 목적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내용 중 일부는 발표자의 기존 글에서 자유롭게 발췌, 사용했음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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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와 관점

(1) 이 발표문의 목적은 조직노동에 기반을 둔 진보정당의 도전이 어떤 제약과 가능성을 갖는가 하는 문제를,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의 긴 정치변화의 맥락에서 살펴보는 데 있다. 논의의 맥락을 넓게 설정하려는 이유는 지난 대선과 뒤이은 분당, 그리고 이번 총선을 거치면서 빠르게 국지화 내지 게토화되고 있는 진보정당 문제가 다시금 사회화되기를 희망하면서, 이를 정파적 언어를 넘어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재조명해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2) 진보정당의 존립과 발전이라는 이슈는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와 관련된 근본문제라 생각한다. 미국이나 현재의 일본처럼 ‘진보정당 없는 민주주의’ 유형이 고착될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는 이미 분화되어 있는 계층적·이념적 차이에 상응해 진보정당도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하는 정당체계, 즉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 유형을 갖게 될 것인가는, 향후 한국 민주주의가 어떤 내용과 질을 갖게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후자, 즉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의 미래가 지금 매우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는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원인을 이야기하고 분당사태와 이를 전후한 대선 패배 및 이번 총선에서 나타난 문제들을 논의해 왔다. 동시에 진보의 재구성, 향후 재창당 일정과 노동운동과의 관계, 정당조직 재편 등의 현안들 속에서 해법을 찾고자 하는 논의들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도 중요하겠지만 이에 대해선 발표자가 특별히 아는 바가 많지 않고, 따라서 논의의 발전에 기여할 바가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발표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 것, 즉 한국의 진보파가 현대 민주주의 그리고 현실적 표현으로서 정당이 중심이 되는 대중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한 문제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요컨대  ‘현실의 실패’ 이전에 ‘이론의 실패’가 먼저 있었다는 점, 따라서 이 차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진보적 정치학을 확립하는 변화 없이는 앞으로의 상황도 크게 달라지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3) 발표자가 우리 사회 진보파들에게 갖는 가장 큰 불만은 분명 그들 역시 권력정치를 하고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를 위해 다투고 있는데도, 늘 언어의 구사에 있어서는 이런 현실을 회피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다보니 모두가 스스로를 권력과 이해관계에 초연한 역사적 역할자로 정의하거나, 자신은 안 그런데 상대가 권력과 이해관계를 다툰다고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또 자신은 원치 않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권력과 이해를 다투게 되었다는 식의 위선과 자기변명의 문법이 일상화되었다. 진보정치도 정치인 한 권력과 이해관계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언어를 가져야 할 것이다. 진보파의 언어가 정치행위의 실제를 반영하지 못할 때, 대개 언어로 이루어지는 민주정치의 현실에서 다수의 신뢰를 조직해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 진보세력의 분열과 매우 초라한 정치적 성과 내지 주변화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정치의 현실을 다룰 언어가 없다면 갈등을 합리적으로 다룰 수 없고, 기껏 누가 더 도덕적으로 규탄 받아야 하는가를 따질 수밖에 없다. 그것도 공론의 장에서 이루어질 때는 상호 자기파멸적 효과를 가져 올 것이기에, 은밀한 방법과 보이지 않는 배타성 내지 내부자라면 누구나 이를 감지할 수 있는 집단적 분위기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가져 오는 부정적 결과는 거의 파멸적인 것에 가깝다. 그러니 진보정치의 영역 내부에서 갈등과 균열이 생길 때마다 도덕주의적인 집단 선택이 강요되고, 결과적으로는 스스로의 사회적 기반을 끊임없이 축소시키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악순환을 끊지 않는 이상 진보정치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논의들은 같은 결과를 낳지 않을까 한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으로 이하에서는 우리 사회 진보파들이 민주주의와 대중정치를 이해하는 문제와 관련해 발표자의 생각을 다소 자유롭게 개진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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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동당은 지난 2004년 17대 총선에서 10석의 의석을 확보하여 화려하게 원내진출에 성공했다. 총선 결과가 발표된 뒤 환호하는 모습   ▶ 매일노동뉴스 ]

2.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문제

(1)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싸웠을 때 민주주의는,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뭔가 해방의 열망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화가 되면 모든 일이 잘 될 거라 생각했고, 그에 따른 기대감도 컸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가 된 후 만나게 된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권위주의 세력은 선거를 통해서도 재집권했고, 과거 반독재 민주연합의 한 축을 이루었던 김영삼 세력 역시 이들 권위주의 세력과 연대해 집권했다. 이때까지 많은 연구자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제한적인 민주주의’라고 정의하거나 ‘종속적’, ‘파시즘적’, ‘(신)자유주의적’, ‘개량적’ 등의 접두사를 붙여 설명했다. 다시 말해 아직 실현되지 않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전제하면서 아직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였던 것으로 이해했다. 적어도 1990년대 초반까지 민주주의는 급진적 사회변혁의 가능성과 중첩되는 의미를 가졌고, ‘민주 변혁’이란 용어가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민주주의는 불완전한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낭만적 모멘트였을 뿐, 민주화 이후의 실제 정치 현실을 포착하는 개념으로는 이해되지 못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민주주의라는 말이 갖는 정서와 의미는 급격하게 달라졌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통해 헌신적 열정 내지 적극적 참여를 동원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다. 급기야 김대중-노무현 정부에게서도 기대했던 변화가 좌절되자, “더 이상 민주주의를 말하지 말자”거나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투표를 하거나 정치 관련 기사나 보도를 수동적으로 지켜보면서 갖게 되는, 어떤 일상화된 느낌 내지 불만과 냉소의 대상에 더 가까운 말이 되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 우리사회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사회학적 내용 변화는 그야말로 극적이다. 그리고 그만큼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문제에 있어서 한국의 진보파는 매우 무력했고, 현실에 밀려 과도한 기대와 때 이른 절망을 반복하는 데 그쳤다고 할 수 있다. 대체 민주주의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2) 민주화를 전후해서 민주주의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이 실망으로 전환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정치학에서는 주술에서 풀려 현실을 보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스페인어 데이센칸토(desencanto)라는 개념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탈신비화가 동반하는 사회심리적 현상을 설명하곤 한다. 우리의 경우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열망과 실망의 사이클’ 등의 용어가 만들어졌고,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적 이해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다.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는 어떻게 운영될 때 그 이념적 가치와 이상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일까? 민주주의를 통해 우리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사회적 성취는 어디까지일까? 경제적으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고 정치적으로 더 이상 권위주의 체제로 역전될 가능성이 없게 된, 이른바 ‘민주주의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나라들 ’(established democracies)을 살펴보아도 그들 사이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이룩한 성과가 서로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정치에 대한 관심과 투표율은 왜 나라마다 다를까? 민주정부가 시장경제체제를 운영하는 방법에 있어서 국가 간 편차는 또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모든 민주주의 국가가 복지정책을 강조함에도 빈곤과 불평등 정도가 나라마다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떤 조건에서 시민은 정부를 통제하는 실질적 주권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또 어떤 상황에서는 정치계급들과 사회 기득세력의 이익추구에 휘둘리고 동원되는 무력한 유권자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마는가? 이 문제들에 대한 좋은 설명은 한결같이 진보정치의 자원이자 무기가 될 수 있는 주제들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 그간 우리사회 진보정치 세력의 성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방법이 곧 진보정치의 자원으로 변화될 수 없다면, 역설적이게도 한국에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진보파의 무덤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3) 누군가 발표자에게 민주주의가 가져온 사회적 성취가 왜 나라마다 다른가를 묻는다면, 그러한 차이는 조직노동에 바탕을 둔 진보정당의 존재 내지 그 영향력과 매우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대체로 조직노동과 진보정당의 영향력이 클수록 투표율이 높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정도는 작고 빈곤율도 낮으며, 소비사회로 경도되는 정도도 덜하고 사회가 성장과 경쟁의 논리에 의해 일방적으로 내몰리는 정도가 작고, 폭력의 정도나 범죄율이 낮으며 문화적으로도 풍요롭다. 반대로 노동운동이 이념적으로 공격받고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적 가치가 정치적으로도 과소대표 될 때, 그 나라의 민주주의 질은 낮고 공동체적 관념은 취약하며,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토양 역시 척박하다. 사회의 중요한 집단이익이 배제됨 없이 폭넓게 대표되는 조건 위에서만 민주주의는 사회를 보다 넓은 공동체적 기반 위에서 통합하는 결정메커니즘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일 뿐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더 절실한 문제이다. 노동이 생산체제, 시민사회, 정당체계 등의 차원에서 충분한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강력하게 조직화되지 않는 한, 현실의 민주주의는 금융자유화의 진전 과정에 개별적으로 포섭된 중산층 중심의 내용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반면 노동은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거나 아니면 노동귀족으로 공격받기 십상이다.
 
한마디로 말해 노동의 참여와 그에 기반을 둔 강력한 진보정당을 만드는 문제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 프로젝트를 만드는 데 있어서 중심문제 중의 중심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은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 모델을 가질 수 있을까? 이른바 미국적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로 일컬어지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노동에 기반을 둔 진보정당이 없는 정당체계)의 경로를 피할 수 있을 것인가? 남북한이 지리적으로 뿐 아니라 이념적으로 분단되어 있는 조건에서, 진보적 이념정당의 대중적 발전은 과연 허용될 수 있을까? 일본의 경우 40년 이상 0.5당의 위치를 굳건히 지켰던 사회당도 붕괴?소멸되었는데, 과연 한국이 ‘미국적 범위’를 벗어나 유럽적 경로를 가질 수가 있을까? 오랫동안 강력한  사회주의 이념정당을 가진 이탈리아에서마저 유럽식 정당체계가 붕괴되었는데, 과연 한국의 진보정당이 때 늦게 등장해 소멸의 위기를 극복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부과하는 시련을 넘어 유력한 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미국을 대표하는 정치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립셋이 유럽 역시 미국화되고 있다며 미국적 예외주의는 끝났다고 조롱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한국은 그 조롱을 피해갈 수 있을까?

(4)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강력한 국가의 존재, 재벌과 주류언론이 중심이 된 강력한 거대 사익들의 기득체제, 분단과 전쟁의 경험이 불러들이는 강력한 이념적 제약 등 한국에서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제약하는 요인은 대개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토대를 갖는다. 하지만 제약 요인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현실이라고 비약할 수는 없다. 각자가 지향하는 정치학의 계보나 전망(perspective)에 따라 다르겠지만, 발표자의 관점에서 정치학의 근본적 강점은 그 어떤 결정론적 사고에도 식민화되지 않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때문에 어쩔 수 없다거나 남북한의 분단을 먼저 극복해야만 진보정치가 열릴 수 있다거나 하는 식의 외재적 환원론은, 근본적으로 미국 예외주의적 접근(즉, 다른 나라와 다른 미국적 예외에서 그 원인을 찾는 접근)의 한국판일 뿐이다. 사실 미국의 진보정당 없는 민주주의 모델이 1920년대 이전에 이미 확립되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사후적 관점에서의 이야기일 뿐 이미 예정된 대로 결과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1901년 창당한 사회당은 1912년 선거를 전후해 2명의 연방 하원의원과 70여 명의 시장을 배출했다. 그랬던 그들이 정당으로서 존립하지 못하게 된 중심적인 이유는 원내 진입 이후 민주정치에 적응해 강력한 대중적 정당 조직을 발전시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 진보파가 겪고 있는 어려움 역시 민주주의를 정치의 무기로 활용하는 방법에 있어서의 무능력, 당 조직을 응집력 있게 재편?강화하는 데 있어서의 무능력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지지할 사회적 기반과 유권자는 존재함에도 이들로부터 정치적 신뢰를 얻지 못했다. 대다수 진보파들은 민주주의와 대중정치를 이해하고 적응하기보다는 기존의 자신들이 견지했던 이념의 언어로 현실을 재단하고 대중을 계도하려는 태도가 더 두드러지기도 했다. 혹은 권력과 권위, 갈등과 대립, 리더십과 통치의 기능을 부정하는, 일종의 정치의 현실을 초월한 급진적 운동론으로 정치조직의 통합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가치와 이념의 실현을 위해 대중과 민주주의를 이용하려 했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거꾸로 민주주의와 대중정치를 가난한 서민대중의 이익 실현을 위한 효과적 무기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은 크게 기울이지 않았다. 요컨대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대중정치에 적응하는 문제는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진보정당의 대중적 발전에서 매우 중대하고도 핵심적인 문제라 생각한다. 

3. ‘어떤 민주주의인가’를 이해하는 문제

(1) 민주주의에 대한 진보적 관점이 개척되지 않았던 것의 결과는, 보수적 관점 혹은 진보정당의 발전과는 배치될 수밖에 없는 잘못된 민주주의관이 지배하게 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문제의 민주주의 관점은 여러 종류의 내용을 갖는다. 민주주의에 의한 자원분배는 비효율적이며, 정치는 가난한 사람들의 표를 얻고자 하는 과정에서 부패를 조장하고, 정치가와 정당은 권력만 추구하는 행위자에 불과하다는 등의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관 내지 정치관이 대표적이다. 민주주의가 조장하는 파당적 갈등을 비판하면서 법치 내지 헌정주의를 강조하거나, 파당적 편견에서 자유로운 것으로 가정되는 전문가들이 정책결정을 주도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지배적 관점의 또 다른 유형이다. 민주주의에 더 큰 기대를 걸아 봐야 소용없다며 민주주의에 대한 집합적 열망을 폄하하거나, 민주주의는 사회분열과 포퓰리즘만 조장할 뿐이라며 은근히 관료제와 귀족정의 원리를 강조하는 접근도 위험하다. 자유주의나 공화주의 등 뭔가 새로운 이념을 불러들여 정치를 새롭게 계도하려는 선지자적 접근이나, 정치 밖에서 공익에 충실한 전문가들 주도의 시민운동을 강조하는 접근도 대중 정치 내지 대중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기 어렵다. 

(2) 이상의 접근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는, 민주주의를 집단적 갈등과 파당적 정치로부터 분리시키려 하거나 대중 참여적 정치를 위험시하고, 정당 정치가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 모델을 부정 내지 축소시키려 한다는 공통점을 갖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정치적 평등의 원리와 대의제도에 기초해 있다. 그 위에서 인민주권의 이념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사회의 갈등적 이해와 열정을 집약하면서 경쟁하는 정당들이 이념적으로나 계층적으로 사회를 얼마나 넓게 대표하고 포괄하게 되는가에 달려 있다. 사회의 중심 갈등들이 배제됨 없이 표출되고 집약되고 경합하게 될 때, 다수 지배가 갖는 정당성의 기반을 강화하고 공동체 전체의 통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회갈등의 파당적 집약과 경합의 조건 없이 다수 지배와 공동체의 통합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민주주의론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가 해결해가야 할 과제는 양심적인 정치가나 공익적인 대통령을 뽑는 사인화된 문제로 환원될 수 없고, 시장원리와 법의 지배 그리고 전문가주의 등 초당파적 원리가 지배하게 하는 것이 될 수 없으며, 모든 정치행위자들의 이익 추구의 경향을 없애고 모두가 공익에만 봉사하게 하는 의식개혁 운동으로 치환될 수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계층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지극히 협애한 정치적 대표체제를 변화시키는 문제, 그 중에서도 지금의 정당체계에서는 대표되지 못한 사회의 하층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심적인 생산자 집단인 노동자의 이해와 열정을 실현할 수 있는 정당이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와 특징을 설명해주는 주요 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문제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3) 정당만으로 충분한가? 전문가의 역할은 필요 없는가? 물론 아니다. 민주주의도 통치를 위한 체제인 한 좋은 정책전문가도 있어야 하고 좋은 관료도 있어야 한다. 시장경제 원리는 부정되어야 하는가? 아니다. 좋은 시장경제체제를 만드는 문제를 소홀히 한다면 민주정치는 좋은 사회경제적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법치와 헌법을 무시해도 좋은가? 아니다. 법치와 헌법은 정치권력의 자의성을 제어하고 체제의 안정성을 뒷받침하는 민주주의의 보루이다. 그렇다면 운동과 포퓰리즘은 이제 부정되어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민주주의 역시 제도이고 조직의 형태로 운영되기 때문에 불확정적인 민중적 에너지와 분리되면 이내 퇴행한다. 현실을 계도하는 지식인과 엘리트 그리고 이념의 역할은 부정되어야 하는가? 아니다. 거대한 정치공동체를 통합하기 위해서는 고정되고 영원한 것은 아닐지라도, 사회적 합의를 가능케 하는 보편적 해석과 합리적 이성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기존의 지배적 접근은 초당파적 지식인과 전문가, 운동, 시장원리, 법의 지배 등을 강조하면서, 민주주의란 사회 갈등에 기초를 둔 파당적 대표체제의 기초 위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에 따른 다수지배적 원리로 운영된다는 사실을 자주 부정적인 것으로 억압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최선의 건강을 위해서는 삼시 세끼 주식만으로 살 수 없고 때로 부족한 비타민과 미네랄을 보충해주는 과일과 건강보조제, 좋은 물도 필요하며, 신체와 정신의 균형 상태를 유지해주는 충분한 휴식과 적당한 운동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세끼 식사를 개선하는 것 대신, 과일과 물, 수면과 휴식, 운동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와 정당의 관계는 건강과 식사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현대 민주주의가 정당 없이 운영되거나 하나의 정당만이 존재한다면, 그건 전체주의가 아닐 수 없다. 2개 이상의 정당이 존재하지만 국가나 군부 등 실질적 통치 집단에 의해 정당 경쟁과 대표의 범위가 통제될 때 우리는 이를 권위주의체제라고 부른다. 물론 민주주의라고 해서 모두 정당정치가 잘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좋은 정당체계와 정당정치를 발전시키는 일 없이 현대 민주주의가 본래의 가치를 가깝게 실현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정당체계를 사회의 모습을 보다 가깝게 닮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화시키면서, 좋은 관료체제와 지식인, 전문가, 운동, 시장, 법치 등의 요소를 잘 결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4)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곧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정당’을 필요로 한다. 권위주의에서 벗어나는 데는 ‘운동의 충격’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대통령 개인으로 사인화된 민주주의는 있었을지언정, 넓은 민중적 기초를 갖는 정당 민주주의의 경로를 만들어낼 만한 정치적 충격은 없었다. 민주화 이후 집권당이 된 과거의 야당이 반독재 정당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정당 조직의 차원에서 근대적 대중정당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의지나 능력을 갖지 못했다. 민주화를 가져왔던 운동은 정당으로 전환하지 않았고 ‘통일전선 운동’에 매몰되면서 스스로의 역량을 서서히 소진해 갔는데, 사실상 그 다른 이면은 운동권 엘리트들이 개인적 차원의 결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제도권 정치 엘리트로 변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실정치에 운동권이 많이 참여하게 되었지만 이들로 인해 정치가 달라지기보다 역으로 이들이 먼저 기존 정치의 낡은 틀에 통합되어 버렸다. 기대를 모았던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정당들 역시 넓게 보면 교육받은 중산층의 정치관이 지배하는 엘리트 정당의 유형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념 정당이라는 규정이 무색하게도, 통일된 강령과 규율은 존재하지 않으며 책임 있는 토론의 체계가 제도화되어 있지도 않다. 편협한 정파 논리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지배하는 자유의지의 과잉이 더 두드러진다. 이들 역시 정치체제 전반에 충격을 줄 만한 새로운 종류의 정당의 경로를 개척하지 못했다. 

(5)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의 경로를 개척하는 데에서 진보파들 내부의 심리적 장애물도 크다. 오랜 권위주의 아래에서 강한 냉전 반공주의의 영향력 때문에 운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행위는 정치적 의도가 없다는 일종의 ‘신앙고백’을 해야 했다. 정치적인 것은 곧 운동의 순수성과 양립하지 않는다는 뿌리 깊은 반정치?반정당 의식은 구조화되고 내면화되었다. 권위주의 아래에서 그것은 운동의 무기였으나 민주화 이후에는 현실로부터의 괴리를 피할 수 없었다. 1987년 민주화 이행기 운동권이 보여 준 태도는 전형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운동권 역시 대통령 후보 중 누가 대안이냐를 둘러싸고 완전히 분열되었고, 제도권 정치 세력들의 보이지 않는 지지자 역할을 했다. 이후 오늘날 ‘386 현상’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운동은 사실상 제도권에 정치 엘리트를 공급하는 가장 큰 수원지 역할을 해 왔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그간 운동권의 공식 언어 속에서 정치와 정당 대안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늘 소수였다. 언제나 다수는 운동을 강조했다. 운동을 강조했던 그 다수의 대부분이 현재는 정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 시민사회운동의 도덕적 영향력이 유독 강한 것이나, 이들 역시 정치의 문제를 다루고 파당적 역할을 함에도 애써 스스로를 비정치적 존재로 정의하는 것도 같은 구조에 기원을 둔 현상이다. 진보적 지식인 대부분이 초당적인 언어 속에 자신을 숨기는 것도 그렇고, 대통령 후보의 캠프에는 비공식적으로 자문하면서 정당의 공식적 자문 역할을 하지 않으려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다. 정치에 대한 생각이 실제 정치 행위와 양립하고 또 실제 행위를 통해 각자의 정치관이 자연스럽게 설명되는 조건을 갖지 않는 한,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로의 경로 전환은 쉽지 않은 일이다. 

(6) 아마도 혹자는 ‘정당의 위기’, ‘정당의 쇠퇴’를 말하는 여러 논의를 인용하면서,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의 길 자체를 부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복지국가의 위기를 말하고 신자유주의가 대세임을 강조하면서 복지국가로의 노력을 시대착오적인 것이라 공격하는 논리들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민주주의가 민중적 내용을 갖기 위해 반드시 발전시켜야 할 정치적 조건을 부정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갖기 쉽다. 한스 달더가 강조하듯, “대개 정당의 위기라는 주장은 정당을 싫어한다는 것을 달리 말하는 것일 뿐”인 경우가 많다.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가 충분히 발전한 뒤 새로운 도전과 요구에 맞춰 변화해 왔고 또 계속해서 변화의 압박을 받고 있는 서구의 정당과는 달리, 이제 정당 민주주의의 단계를 거쳐야 할 우리의 경우 ‘정당 없는 민주주의’의 경로를 강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정당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고 또 정당 위기론의 문제제기에 수용할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우선은 쇠퇴할 정당 모델이라도 가져야 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7) 물론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유럽에서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정당 민주주의가 안착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들어서였다. 그러니 오랫동안 진보정당이 허용되지 않았던 한국의 경우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 모델을 발전시키는 문제는 더욱 어려운 과제라 할 수 있다. 그간 민주노동당 안팎에서 표출되었던 여러 혼란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 설령 정당의 조직화와 제도권 진입에 성공했다 해도 어려움은 많다. 정당은 여러 형태의 대표의 원리로 조직된다. 하지만 조직의 규모와 활용할 수 있는 권력 자원이 커질수록 대표와 대표되는 자 사이의 불평등 관계는 증가한다. 활동가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인센티브의 제공 없이 무작정 확대될 수 없게 되며, 지위와 영향력을 추구하려는 욕구의 증가 역시 피할 수 없다. 따라서 권력 자원을 제도화하려 하지만, 제도화는 불가피하게 조직의 일상화?형식화?관료화를 동반하게 된다. 당이 당원에게 책임지는 것과 지지자에게 책임지는 것 사이의 긴장과 충돌이 커지는 것도 불가피하다. 당원의 이익조차 동질적인 하나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하며, 다수결의 원리는 늘 소수파의 불만과 반발을 낳고 정파적 세계관 사이의 격차는 줄어들기보다는 커진다. 파벌과 정파 사이의 갈등은 일상적이 되며, 이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권력정치와 타협, 거래의 필요성 역시 불가피하게 증가한다. 현재의 이익과 미래의 이익 사이의 갈등도 크다.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의 바람직함과 현실에서의 자원 제약 사이 격차는 언제나 존재하고, 이로 인해 당과 지도부의 불완전한 결정은 자주 논란에 휩싸이며, 그 결과 당원과 지지자는 미래에 대한 심리적 불안의 문제를 안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것들 때문에 정당으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사실 정당 민주주의의 미래는 없다. 근본적으로 이런 문제들은 모두 정치의 세계가 본질로 하는 특징들이다. 정당은 그 조직적 딜레마 때문에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딜레마 때문에 다른 어떤 조직 형태보다도 인간과 사회의 실제 현실과 대면할 수 있었고, 여러 불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체제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정치조직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만큼 정당은 인간의 정치적 본성에 가까운 존재이며, 당연히 인간의 창조적 실천에 의해 나라마다 나름의 대안적 모델들을 발전시켜 왔다. 정당의 약점이자 강점은 그것이 이상적 대안이 아니라 현실적 대안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그간 한국의 진보정치의 실험은 그러한 현실적 정당대안을 만들어내는 데 매우 무능했다. 그리고 그 무능은 정치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한계가 많았던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바 크다. 이제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4. 정치와 정당의 세계를 이해하는 문제

(1) 운동으로서 민주화세력이 정치 영역에 참여한다는 것의 가장 이상적인 내용은, 정치의 방법으로 힘을 조직하여 가난한 서민대중의 삶의 현실을 보다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핵심은 ‘정치의 방법으로 힘을 조직한다는 것’, 다시 말해 ‘정치의 방법’에 대한 문제이다. 정치의 방법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정치학의 전제는, 정치란 개인의 차원 나아가 운동성 내지 도덕성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세계를 갖는다는 데 있다. 따라서 ‘초심’, ‘도덕성’, ‘운동성’과 같은 도덕률이 정치의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러한 접근은 무엇보다도 정치를 현실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정치의 현실이 포착되지 않는 조건에서 정치의 방법으로 힘을 조직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도덕성은 개인의 자율적인 판단의 영역에 있는 것이지 강제될 수 없는 것이다. 도덕성이 정치적 행위를 규제하는 기준이 될수록 정치가 도덕적일 수 있는 기반은 파괴된다. 한국처럼 도덕성이 강조되는 정치도 없지만 한국정치가 도덕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은, 한국의 정치가가 부도덕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성을 따지는 동안 실제 개선해야 할 정치의 현실을 놓쳐버리고, 결과적으로 부도덕한 정치 현실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정치에서 자주 사용되는 ‘의식개혁’이라는 접근도 마찬가지다. 기실 사람의 의식과 내면세계를 뜯어고치자고 말하는 것 자체가 반자유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것이지만, 개개인의 의식을 문제 삼는 동안 정작 문제가 되는 의식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조건은 건재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가는 교체되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도 유사한 의식과 관행이 반복되는 정치구조는 변함이 없게 된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듯이, 좋은 시민이 좋은 정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든다. 정치의 체계와 구조를 좋게 만드는 것만이 시민사회 내지 생활세계의 도덕적 기반을 널리 확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이 들어오지 않는 한 민주정치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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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9총선 개표 후 한나라당이 과반의석 확보가 확정된 뒤 환호하는 모습  ▶ 오마이뉴스 ]

(2) 근대 정치학은 도덕주의와 단절하면서 출발했다. 달리 말하면 가난한 대중의 운명이 정치가의 선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반대중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접근이라 하겠다. 아무리 선한 정치엘리트나 그 어떤 민중적 교리를 갖는 정당도 대중의 요구로부터 제약되는 정치의 체계가 기능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도덕적 헌신은 무뎌지고 편협한 조직의 관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이상적 민주주의라 해도, 민주주의 역시 ‘지배’의 한 형태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규모 정치공동체를 움직여야 하는 이상 체계와 조직을 필요로 하고, 그만큼 기능에 따른 위계구조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가 없는 민주주의는 없으며, 본래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국가의 한 형태로 정의되고 개념화된 것이다. 물론 국가 없는 사회를 구상할 수는 있겠지만, 정확히 말해 그것은 민주주의를 넘어선 차원의 이슈이다. 불평등의 원리로 조직된 시장메커니즘이 생산적 자원의 분배와 할당을 지배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등화의 가장 강력한 기제는 민주주의이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정치적 평등의 원리에 따라 조직된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시장체제가 기능하는 한 국가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현실의 불평등체제를 안정화시키는 데 기여하기 쉽다.

(3) 정당 혹은 당파성의 문제도 그렇다. 현대 민주주의는 선거를 제도적 채널로 하는 정치적 대표의 체제를 그 핵심으로 한다. 로베르또 미헬스가 강조했듯이, 이는 불가피하게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엘리트들의 과두체제 혹은 이들로 이루어진 정당들 간의 과두체제를 발전시킨다. 그럼에도 이를 민주주의의 현대적 유형이라 부르고, 나아가서는 고대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적이고 더 실천 가능하다고 샤츠쉬나이더가(E. E. Schattschneider)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사회 갈등의 정치적 대표와 경쟁의 원리가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엘리트와 정부를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당으로 조직된 복수의 정치적 대안들이 존재해야 하고, 이들 사이의 실질적인 차이가 일종의 물리학적 효과를 가져야 한다. 사회의 균열기반 위에 위치한 여러 집단들의 이익과 열정을 복수의 정당들이 경쟁적으로 동원하여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확대하고자 하는 파당적 경쟁의 효과가 작용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 시장의 분배구조에서 소외되어 있는 약자들의 요구가 국가의 정책결정에 반영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4) 사회경제적으로 지배적 위치에 있는 집단은 ‘지금 있는 현실’의 힘의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지만, 다수의 형성이라는 민주주의 방법을 통해 불평등 구조를 개선해가고자 하는 진보세력의 경우 대안적 이념은 ‘지금의 현실이 개혁된 내일의 현실’을 추상적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다. 현상유지를 바라는 집단이야 현재를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족하지만 현실의 변화를 지향하는 진보세력의 눈은 불가피하게 미래에 두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대규모 집합행동을 이끌고자 하는 진보세력에게 ‘확신의 딜레마’는 피할 수 없는 도전이다. 합리적 선택이론에 기초한 정당론을 개척한 앤소니 다운즈가 정당의 세계에서 이념의 역할을 강조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정당들이 발전시키고자 하는 이념을 ‘확신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합리적 기제 내지 지름길(shortcut)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현실적인 내용과 체계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념만으로 정당조직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해결하기는 부족하다. 정당론에 대한 ‘최후의 패러다임’을 개척한 안젤로 파네비안코가 강조하듯, 리더십의 발전 없이 정당조직을 통합할 방법은 없다. 거대한 규모의 정치조직을 제도나 추상적인 규칙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현실이 아니다. 정치란 폭군이나 독재자의 출현가능성을 감수하고도 인간이 사회를 조직하고 통합하는 불가피한 방식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정치 없이 시민적 삶을 발전시키기는 불가능하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치의 핵심은 좋은 통치자를 만드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정당이 중심이 되는 현대정치에서, 정당은 곧 국가의 통치권을 두고 경합하는 정치적 리더십의 조직적 표현과 같은 것이다. 응당 조직으로서 정당의 발전을 위해서는 집합행동의 딜레마를 완화시키는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념을 필요로 하고, 자연스럽게 리더십의 발전과 조직적 권위와 규율의 체계화가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정당의 모델을 말하면서 막연히 ‘대중적’인 어떤 정당조직을 연상하곤 한다. 그러나 19세기 이래 서구민주주의를 이끈 대중정당은 매우 응집적인 이념정당이었으며, ‘민주집중제’라고 불리는 강한 리더십과 조직적 규율, 다양한 대중단체를 특정 방향으로 이끄는 당 활동가들의 당파적 역할로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이러한 정당모델을 그대로 실현할 수야 없겠지만, 그러나 그 기본 원리는 오늘날에는 물론 미래에도 부정될 수 없다.

(5) 결국 핵심은 권위, 권력, 국가, 정당, 당파성, 리더십의 좋은 모델을 발전시키는 데 있는 것이지, 그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정치 자체를 없애버리는 접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간 우리 사회의 진보파와 개혁파들이 반정치, 반국가, 반권위 등을 특징으로 하는 극단적 자유주의의 공세로부터 민주정치를 얼마나 지켜냈는지 회의적이다. 지배담론화된 정치개혁론이 민주화 이후의 정치를 부패하고 부도덕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사이, 반정치와 투명성, 효율성을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치관과의 접합은 훨씬 강화되었다. 정치는 쉽게 회계학의 원리에 따라 교정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했고, 대중 속에서의 정치활동 역시 부패 가능성을 이유로 부정시 되고 구태라고 비판되었으며, 방송매체를 활용한 정책토론회 등 대중과 유리된 정치가 무비판적으로 강조되었다. 사회적 갈등구조를 초월하여 주류언론-재벌-검찰-시민운동-주류학계를 묶는 광범한 ‘정치개혁 담론동맹’이 맹위를 떨치는 사이, 민주정치와 정당정치는 점점 사회적 기반을 상실해 갔다. 급기야 세계에서 가장 투표하기 쉬운 나라라 할 수 있는 한국에서 46%의 총선투표율이 나타나고 말았다.

(6) 모든 정당이 당내 민주화를 말해왔고 지금도 계속 그 패러다임 안에 서 있다. 문제는 당내 민주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하면서, 좋은 정당이 되기 위해 당연히 발전시켜야 할 리더십과 이념, 적절한 조직규율 등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데 기여해왔다는 사실이다. 정당은 반드시 민주적이어야 하는가? 답은 ‘아니다’이다. 반드시 민주적이어야 하는 것은 정당체계이다. 민주정치의 핵심은 개별 단위(unit)로서 하나의 정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들, 즉 단위들 사이의 관계양식을 말하는 체계(party system)에 있기 때문이다. 단위로서 정당은 기본적으로 자율적 결사체의 성격을 갖는다. 어떤 정당은 자신들이 대표하고자 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위계적인 조직구조를 가질 수도 있고, 과두제적인 결정구조를 유지하거나 이념을 중시하며 상층 엘리트 사이의 집단지도체제를 발전시킬 수도 있다. 가능한 민주적 가치와 원리가 당내에서 발전해야겠지만, 그것이 조직으로서 정당 내지 리더십의 발전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물신화하는 일이 된다. 민주주의든 진보든 민중을 위한 것이며, 거꾸로 민중이 그러한 이념적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치와 정당 역시 추상화된 원리나 가치에 맹목적으로 종속되는 영역이 아니라 인간들이 살아 움직이는 현실의 공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7) 당내 정파는 한국 사회 진보파를 괴롭혀 왔던 대표적인 문제였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정파의 존재 때문에 문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파의 존재와 이들 사이의 경쟁이 당내 활력과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정파의 문제를 그렇게 다루지 못한 것, 다시 말해 리더십이 기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였던 것이다. 막스 베버는 ‘지도자가 있는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지도자가 없는 민주주의’에서는 대중권력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정파와 붕당이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발표자는 오늘날의 한국 진보정치의 현실이 정확히 베버의 말과 같게 되었다고 본다. 2004년 원내 진입과 함께 어렵게 만들어진 진보의 정치적 자원이 탕진된 것은 정파 때문이 아니라 강력한 지도부의 부재로 인해 정파의 폐해가 무제한으로 허용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직화와 리더십에 부정적인 정향은, 대개의 경우 개인적으로 발언권을 더 크게 가질 수 있어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지도부 등장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중산층 엘리트들의 욕구를 반영한다. 강력한 리더십의 체계가 작동할 때 이들의 욕구는 조직 내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지만, 반대로 리더십의 체계가 작동하지 않을 때는 언제든 정치조직의 파편화 내지 정파의 과도한 족출을 만들어내는 기반이 된다. 진보적 관점을 담은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학 교과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강한 정당의 부재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축소하고 선거를 중간계급 위주의 것으로 만든다.” 이 간단하면서도 단호한 주장이야말로 현대 정치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발표자는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대중과 대표를 연결하는 수직적 책임성(vertical accountability)이고, 이는 이념과 집단, 조직 등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져야겠지만, 구체적 인물과 지도자를 초점으로 한 직접적 대표성(direct representation)의 원리에 의해서도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진보정당은 정치적으로 더 강해져야 하고, 그러려면 사회적 요구를 구체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리더십 형성이 시급하다. 과거 민주노동당의 사례로 볼 수 있듯, 한국의 진보정당은 개인으로 상징되는 리더십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정당조직 모델을 고집했다. 아마도 이 점은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 사례를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진보정당이 갖는 자원과 잠재력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빈약한 성과로 이어졌다. 정당이 하나의 조직인 한, 그것도 사회의 개혁자가 되고자 하는 진보정당인 한, 리더십의 문제를 경시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현실의 민주주의가 먼저 정부로 하여금 통치하게 한 뒤 그것에 책임성을 묻듯이, 정당조직에서도 중요한 건 먼저 리더십이 기능하게 하고, 그러고 나서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권위주의적 요소들과 대면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치(人治)가 갖는 독단성과 임의성을 제어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인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정치를 없애는 것과 같다. 그간 한국의 진보정당은 보수정당과는 달리 ‘인치의 과잉’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기대와 대중적 열망을 응집시킬 수 있는 ‘인치의 부족’ 즉 리더의 부재 때문에 더 많은 문제를 낳았다. 아데나워 시대의 독일 기민당, 브란트 시대의 독일 사민당, 맥도날드 시대의 영국 노동당, 미테랑 시대의 프랑스 사회당, 베를링게르 시대의 이태리 공산당을 말하듯, 한국의 진보정당도 리더십의 특징과 결합된 직접적 책임성의 구조를 발전시키는 데 소극적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5.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은 얼마나 열려 있는가

(1) 어느 나라든 민주화는 두 단계를 거친다. 첫 단계는 권위주의 구체제에 반대하던 세력이 집권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 단계는 구체제에 기원을 둔 정당이 민주적인 방법으로 재집권하는 것이다. 이번 한나라당의 대선과 총선 승리는 그 시작을 의미한다. 이 두 단계의 정치변화는 두 가지 효과를 가져 온다. 첫째는 어떤 세력이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욕구를 실현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은 존재할 수 있지만, 어느 정치세력도 반(反)민주주의를 내걸거나 권위주의 체제의 복원을 추구할 수는 없게 된다. 그리하여 민주주의가 정치의 영역에서 유일한 게임의 규칙이 된다는 의미에서, 정치학에서는 이를 ‘민주주의의 공고화’라고 개념화한다. 둘째는 이 과정에서 형성된 정당체계가 그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그대로 지속되는 효과를 갖는다는 데 있다. 해당 사회에서 제출될 수 있는 모든 정치적 대안들이 선거라는 민주적 정치과정을 통해 대중적으로 테스트되고 나면 대체로 그 결과가 반복된다는 뜻이다. 유럽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의 정당 역시 대부분 100년 안팎의 긴 전통을 갖고 있으며, 미국의 양당체제가 다당체제로 변화될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듯이, 일단 정당체계의 패턴이 공고화되면 잘 변하지 않는다. 정당 이론에서는 이를 ‘형성기 정당체계의 유형적 특성이 갖는 관성의 법칙’이라 부른다.

(2) 민주화가 두 단계의 정치변화를 거치면서 한국의 정당체계 역시 두 단계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첫째는 민주화와 더불어 기존의 정당대안이 복원된 체제의 등장이다. 남미의 민주화를 관찰하면서 바바라 게디스는 민주화 직후의 정당체계는 권위주의화 직전 단계의 정당대안을 복원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다는 특징을 발견한 바 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주화 직후 등장한 정당체계는 집권 민정당과 함께 과거 보수 야당의 두 정파인 YS당과 DJ당, 그리고 3공화국의 공화당을 그대로 복원했다.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낡은 대안이 대중적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처음부터 새로운 진보적 정당이 참여하는 정당체계의 재편은 어려웠다는 뜻이다. 두 번째 변화는 민정당, 공화당, YS당, DJ당이 차례로 소멸 및 약화되면서 나타난 정당체계로, 시기적으로는 2004년 총선에서 표출되었다. 2004년 총선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 정당대안들이 모두 정치적 권위를 심각하게 위협받았다는 데 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분명 새로운 정당이었고, 이들이 이후 정당체계를 어떻게 재편하느냐에 따라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 후의 사태전개를 통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기대와는 크게 달랐다. 

(3) 우선 보수적 한나라당의 조직적 재편과 사회적 기반은 점차 안정화되었다. 열린우리당과 뒤 이은 통합민주당은 매우 혼란스러운 변화를 보여주었지만, 크게 보면 형태만 달리할 뿐 과거 보수야당과 유사한 경로를 되풀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성장우선주의와 결합된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는 더욱 강해졌다. 결국 이 두 종류의 보수정당 사이의 경쟁체제가 과거의 보수양당체제와 큰 변화 없이 재구축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이 독자적인 조직모델을 발전시키지도 못하고 사회적 기반을 확장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이 새로운 형태의 보수양당체제가 발전하는 것을 도왔다. 지금 단계에서도 어느 정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향후에도 한국의 정당체계는 대통령 권력의 소유권을 둘러싼 보수적 양당체제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체제가 공고화된다면 적어도 정당체계의 차원에서 한국의 민주화는 결국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 된다. 어찌될 것인가? 한국의 진보정당은 제3당으로서의 지위를 더욱 굳건히 발전시키면서 보수적 양당체제의 공고화를 저지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될 것

  • 제작년도 :
  • 통권 : 제1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