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의 창] 노사관계의 민주화와 '산업적 시민권'의 실현을 향하여

 
- 최장집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1. 경제민주화담론의 문제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만큼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는 사회집단은 없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부정적인 편견의 대상이 되는 사회집단을 꼽으라면 노동자들과 노동자들의 조직체인 노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노동자, 노동운동을 정치적으로 배제 또는 억압하고,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의 성장 혜택으로부터 불공정한 배분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는 민주화 이후 보수적 정부들이나 진보적 정부들이나 큰 차이가 없다. 혹자는 경제민주화를 시대정신이라고 까지 말하지만, 이 말은 조직노동자들과 그들의 운동이 민주적 가치와 규범, 그리고 제도 속으로 포용돼야한다는 요구를 담지 못한다. 경제민주화담론의 중심 주제인 재벌개혁 이슈에서도 노동문제는 그 중심 요소의 하나로 포함되지 못하고 있다. 사회복지정책을 운위할 때도 노동조합의 역할을 함께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노조의 역할 없는 사회복지체제의 확대는 분명 복지관료행정체제의 역할과 권한, 복지전문가들의 역할을 확대하면서, 관료주의와 온정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대기업, 중소하청기업 내에 노조가 허용된다면, 또 그것이 자율적이라면, 그리고 대재벌기업의 사업장, 회사 내의 작업장이나 일터의 분위기는 훨씬 더 민주적이 되고, 일에 대한 윤리와 열성, 자유와 개인이니시어티브를 더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대졸자들의 직장체류기간이 왜 그렇게 짧은 것인지, 또는 노조가 허용되지 않는 중소기업에 왜 대졸자나 좋은 인력이 취업을 회피하는지에 대해 정책결정자들이나 기업들은 잘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정치인들과 정책결정자들은 중소기업에서의 인력수요와 대졸자들의 인력공급 사이의 미스매치에 대해 말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한 노조의 긍정적 역할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기업 내의 자체혁신과 자발적 노동윤리를 창출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러한 기업구조를 통해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은 얼마나 효율적이고, 효과적일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적이다. 
 
 
2. 노동과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노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노동운동의 내용과 성격 역시 달라져야한다. 노동자, 노동운동은 제조업부문에서 우리가 보통 노동자, 노동조합이라고 말할 때의 의미보다는 훨씬 넓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을 직접 일하는 사람, 일을 통해 사회경제적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으로 정의하는 것이 더 좋고, 더 옳다. 노동자라는 말은 극히 넓은 의미를 갖는다. 그러할 때 노동문제는 모든 사회구성의 중심에 위치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자라고 말할 때, 산업부문 가운데서 특히 제조업생산부문의 일하는 사람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좁은 의미에서의 노동자를 말할 뿐이다. 그럼으로 일반적 의미에서 노동자는 생산직노동자, 사무직화이트칼라, 서비스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소자영업자 등, 여러 다른 기능적 범주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를 포함한다. 우리가 보통 노동문제라고하면 노사 간 대립, 갈등이 일단 머리에 떠오르고, 불손하다,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 국가의 중심적 가치와 목표를 실현하는데 장애물이다. 이런 인식이 강하다. 노동자하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성원이라고 생각하고, 칼 마르크스의 계급혁명과 연결시키게 되고, 나아가서는 북한체제의 공식이데올로기와 뭔가 관련된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사실 계급문제를 제일 먼저 말했던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정치이론의 시작, 민주주의의 시작단계에서부터 부자와 빈자 간의 계급갈등은 그 중심 주제의 하나이다. 프랑스혁명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헌법을 이론적으로 설계해서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 4대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도 미국 연방국가의 제도적 원리를 구상하고 발전시킬 때 노동문제로 발생하는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어떤 것보다 깊이 생각했다. 그 가운데서 마르크스는 계급갈등을 혁명이론으로 발전시켰던 대표적인 급진적인 사회이론가이자, 사상가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노동문제를 보는 관점,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여러 이론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요컨대 노동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문제를 어떻게 보느냐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산업적 시민권’의 요구 
노동문제를 배제하는 것은 일을 통해 먹고사는 사람들의 인간됨, 인간의 자유와 평등함, 인격성과 자기존중, 이러한 인간적 삶의 핵심적 가치를 제약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인권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것은 가장 기초적인 면에서 시민권에 상응하는 말이다. 2차 대전 후 영국에서 사회복지체제의 발전과 당위성을 이론화한 사회학자 T.H. 마샬의 이론을 따르면, 보편적 인권을 기초로 시민권개념이 출현한 18세기로부터 20세기 전반기에 이를 때까지 시민권은 진화하면서 확대돼왔다. 19세기 중후반 이후 보통선거권의 확대를 뒷받침한 정치참여의 권리로서 정치권으로,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사회가 경제발전의 결과로 획득하게 되는 성과를 개인의 사회경제적 생활을 위해 분배받을 수 있는 사회적(경제적) 권리로 확대발전돼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땅히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산업적 권리(industrial rights)에 대해서는 마샬이 그 중요성을 언급했다 하더라도, 이를 시민권, 정치권, 사회권을 중심으로 한 일반적 시민권(citizenship)개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점에서 1980년대 초 사회학자 안쏘니 기든스가 산업적 권리가 시민권개념에 포함되어야한다고 주장한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생산부문의 작업현장에서 그리고 노동현장에서 사용자 측과 대화하고 교섭할 수 있는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말한다. 무엇보다 결사체로서의 노조를 조직할 수 있는 권리, 경영 측과 평등하게 교섭할 수 있는 노동자/노조의 권리를 내용으로 한다. 그리고 기업과 작업현장에서 경영 측과 노조가 대화하고 교섭하듯이, 전국수준에서도 노조가 상호인정과 존중을 통해 사용자단체와 교섭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다. 또한 노동시장에서의 임금에 관한 단체교섭을 할 수 있는 권리 등을 포함한다. 물론 산업적 시민권은 노조가 노동자들의 권익과 의사를 대표하고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도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4. 한국에서의 노사정 3자 협력기구는 유럽의 코포라티즘적 제도인가?
박근혜 정부의 노동정책은 노사정위원회를 설치하고, 노사정합의를 통해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추진해온 것을 중심으로 한다. 여러 개혁 이슈들 가운데서도 노동자파견법 개정을 밀어붙이고, 노동자평가를 강화하는 것을 통해 해고의 범위를 사실상 확대하고, 노동자들에게 불이익을 안겨줄 내용들이 이 기구에서 중심적인 쟁점으로 부각된 바 있었다. 이 제도의 문제는 형식에 있어서는 합의적 측면을 가질 수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격렬한 노조의 반발을 불러오는 내용으로 합의를 강제한 억압적 성격이 강했다. 이를 억압적, 배제적 코포라티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하고 있는 것은, 공권력의 동원을 통해 노조로 하여금 합의하도록 강제하는 권위주의적이고 배제적인 ‘국가코포라티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에서의 코포라티즘은 70, 80년대를 통하여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에서 그 전성기를 누렸던 사회협력적인 ‘사회적 코포라티즘’은 아니다. 이 시기 유럽에서의 코포라티즘은 노조가 자발적으로 노사정협력기구에 참여하여, 정부의 소득정책을 추진하는데 협력했다. 스스로 임금을 억제하고,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기업이익창출에 협력하고 경제성장둔화에 대응하면서 재정압박을 완화하는데 솔선하여 스스로 그들의 이익실현을 자제했다. 노조는 노동자들의 이익실현에만 몰두하는, 자기이익실현을 위한 결사체만은 아니다. 노조는 기업의 이익실현에 협력하고,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그리고 경제불황기 사회 전체의 경제성장을 위해 스스로의 이익실현을 절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칼럼은 '노동사회' 192호(2017년 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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