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의 창] 한국 정치역학의 세 고리/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9월 30일부터 연구소 내부 성원과 이사진 등을 주요 필진으로 칼럼 <연구소의 창>을 시작합니다. 칼럼은 매주 월요일 홈페이지에 게재되며, 노동 문제를 주제로 다룹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

 
한국 정치역학의 세 고리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leewb@daum.net)
 
최근 한 달 전후의 정치상황은 그 예를 찾기 어려울 만큼 복잡다단했다. 국정원 대선개입 정황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국정원과 새누리당은 2007년 10.4 남북정상회의록과 NLL폐기발언 의혹을 일방적으로 공표했다. 민주당은 장외투쟁으로 국회를 뛰쳐나가고, 시민·학계 ·종교·사회운동단체 항의 시위는 날로 확대되면서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는 수만 수천의 시민촛불이 매주말 어둠을 밝히고 나섰다. 그러나 국정원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사건 발표로 정치판을 블랙홀로 몰아넣었다. 추석이 지나자 조선일보의 ‘혼외아들설’ 보도로 검찰총장이 사퇴하고, 기초연금 지급문제가 언론매체를 가득 채운다. 거기다 식민지근대화론, 반민주적 영웅사관으로의 반전을 노리는 역사교과서의 왜곡까지 등장했다. 
 
집권 후 6개월도 안돼 두 번씩이나 사과를 했던 박근혜 정부는 출범 후 일곱 달을 하루 넘긴 9월 26일, 세 번째 사과의 발언을 했다. 대선 때 약속했던 노인연금을 한 달에 20만원씩 못주게 된 데 대해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다음 날 청와대 노인모임에서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대통령은 한 번 더 사과를 했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그다지 기세가 꺾인 것 같지는 않다. 온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기존의 중대문제들에 대해 오불관언에 민생을 외면했다는 대야공세로 일관한데 이어 이번에도 결코 공약 파기가 아니라, ‘국민대타협위원회’를 통한 사회적 타협으로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야당은 말할 자격도 없다고 여당 수뇌부들은 소리 높여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도도할 정도의 이런 태도들은 ‘원칙과 신뢰’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브랜드에 지리멸렬한 싸움 끝에 국회로 황망하게 되돌아온 민주당의 초라한 후퇴, 최근에는 개성공단의 재가동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중단시킨 북한의 도움(?)까지 겹쳐 민심의 지지가 70%를 넘나들고 있는데 대한 자신감이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올해 들어 전개되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은 정치역학적으로는 여당의 승세와 야당의 퇴조에서 빚어진 결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잠시 깊이 들여다보면 최근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발전을 규정해왔던 주요한 모순들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 하나는 경제결정론이다. 경제만 잘되면 만사형통이라는 이 논점은 경제성장 우선론으로 채색되고, 급기야 재벌의 효용성을 옹호하기 위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에서 선성장 후복지론으로까지 각색된다. 이 논리는 경제위기가 오면 더욱 위력을 발휘하여 민주주의의 파괴까지 정당화하는 무기로 변화한다. 민주주의의 회복과 민생 해결이라는 의제로 마주했던 대통령과 여야 대표 회담이 결렬됐던 것도 기실은 경제논리의 우세승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 경제가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재벌 대기업의 투자증대 요구를 반영하여 시대적 의제로 제기됐던 경제민주화는 이미 물 건너간 것으로 보이고, 박근혜 정부의 ‘한국형 복지’의 핵심을 이루는 4대 중증질환 치료비 100% 보장이나 반값등록금과 고교 무상교육 등도 기약 없이 밀리고 있는데다 지자체 무상급식비까지 중단하는 사태 등도 모두 경제사정이 그 이유다. 기초연금 삭감도 세계경제 침체로 인한 세수부족 등을 고려한 것이라고 했다. 이 같은 경제만능론은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는 묵은 격언으로, 통상임금 해결의 지연이나 비정규직노동, 특수고용 문제들의 방치를 합리화 하는가 하면 공무원노조나 전교조의 규약개정 요구처럼 민주주의 요체인 노동기본권의 신장 보다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동운동의 후퇴를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경제위기가 지구촌의 구조적인 문제로 갈수록 심화되는 상황에서 역사적 의제로 제기된 경제민주화, 사회복지, 민주주의 확장 등이 오히려 위협받고 그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더욱 높아질 수도 있다는 전망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비롯되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 사회의 큰 손은 보수진영의 힘과 논리전파의 파괴력이다. 보수 세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이 사회를 지배해왔다. 진보 민주개혁 진영의 저항이 간간이 표출되기도 했지만 번번이 좌절되거나 변질되었다. 그 중심은 자본과 언론이다. 자본은 사회 곳곳을 장악하고 지배 권력의 풍향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현실적인 역량을 갖고 있다. 일자리 만들기나 고용률 70% 달성, 중산층 70%를 위한 투자 동기를 빌미로 열화와 같은 국민들의 경제민주화의 열망을 잠재우고 법인세 감세기조의 유지를 강제할 수도 있다. 지난 5년여 동안 숱한 갈등과 대립 투쟁을 거치며 보수 세력에 의해 장악되어온 언론은 이제 이 나라 권력의 핵심인 검찰총장을 내쫒는가 하면 남북한 평화의 갈림길을 만들어내고 전 대통령의 발언록을 파헤쳐 부관참시 직전까지 몰고 가는 무시무시한 괴물로 성장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왜곡의 선봉장을 서슴지 않는다. 
 
세 번째로 들 수 있는 이 사회의 심각한 모순은 반공주의 냉전적 질서와 사고가 여전히 완강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국민기본권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해온 이 이데올로기는 최근 이석기 사건에서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의식과 행태를 규정하는 핵심적 요소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개혁위기에 몰린 국정원이 사건을 터트리자 온 나라가 경악과 충격 속으로 휘말려들었다. 새누리당은 마치 대규모 간첩단이 전란이라도 터트린 것처럼 난리법석이고, 민주당은 진상규명은 고사하고 불에 덴 송아지 같이 갈팡질팡하다가 여당의 기조에 동조하고 말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변혁을 지향한다는 진보정당도 당론으로 국회의원-그 정당과 의원에 대한 평가는 별론으로 하고-에 대한 체포동의를 결정했다는 사실이었다. 야당 스스로 지적한 것처럼 국정원의 대선개입이라는 민주주의 파괴행위에 항의투쟁을 전개하던 세력들이 하루아침에 국정원의 일방적 발표에 동감해야 하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수구 보수언론이 널을 뛰는 것은 그렇다 치고 진보와 민주개혁을 지향한다는 언론들도 크게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한때이지만 국정원 사태의 본질을 뒤로 하고 국정원의 발표만을 중심으로 통합진보당과 문제의 인물들을 집중 공격했던 것, 이것은 세계적인 민주화 주자로 손꼽힌다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냉전적 반공주의 체계에 얽매여 있는지, 그 인식과 실천의 수준을 짐작케 하는 일들이었다.  
 
이러한 케케묵은,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를 옥죄고 있는 이 문제들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하나는 일제시대를 비롯한 잘못된 역사 청산에 철저히 실패함으로써 역사와 민중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식과 생활태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현실적으로는 국민의 민주적 발언과 참여를 보장하고 촉진하는 대중운동이 취약한데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노동운동 진영이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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